13. 전지왕과 구이신왕

전지왕(재위405~427)

전지왕(琠支王)<혹은 직지(直支)라고도 하였다.>은 양서(梁書)에는 이름을 영(映)이라고 하였다. 아신(阿莘)의 맏아들이다. 아신이 재위 3년에 태자로 삼았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였다.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혈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전지는 왜인(倭人)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니 아들 구이신(久爾辛)을 낳았다.

2년(406) 봄 정월에 왕이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고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으며,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해충(解忠)을 달솔(達率)로 삼고 한성(漢城)의 조(租) 1천 섬을 주었다.
전지왕의 한성은 신제도였으므로 아신왕성인 임진강 고마성이다.

3년(407) 봄 2월에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았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으로 삼았고,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는데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

407년에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고구려는 보기병 5만을 보내서 신라군과 연합하여 가야을 쳤다.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를 보내어 .... 합전하여...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佳城,○○○,○○○,나○성 등을 빼앗았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那○城.

 

이때 408년에 백제 유주자사를 지낸 부여진이 죽어서 평양 덕흥리에 묻힌다. 그러나 그는 고구려 관직을 받았고 영락 연호를 사용했으니 고구려에 투항한 백제 왕족이다.


4년(408) 봄 정월에 여신(餘信)을 상좌평(上佐平)으로 삼고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의 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고려의 총재와 같았다.

5년(409)에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夜明珠)를 보내니 왕이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
11년(415) 여름 5월 갑신에 살별彗星이 나타났다.

12년(416)에 동진(東晉)의 안제(安帝)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명(冊命)하여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13년(417) 봄 정월 초하루 갑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2월 3일이다. 0417 Feb 03 00:17 A 76 0.441 0.927 9.5N 174.9E 64 303 09m59s

여름 4월에 가물어서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7월에 동부(東部)와 북부(北部) 두 부(部)의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는데 병관좌평 해구(解丘)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사구성(沙口城)은 407년에 고구려군에게 함락당한
沙溝城과 같은 것으로 본다. 동부인을 동원하였으니 동해안으로 고려된다.

14년(418) 여름에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흰 면포 열 필(匹)을 보냈다.

15년(419) 봄 정월 무술에 살별이 태미(太微)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초하루 정해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12월 3일이다.
0419 Dec 03 02:29 P 68 1.155 0.715 64.2N 172.6E 0

16년(420)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전지총 고분 기록에 의하면 391년에 태어나~432년까지 살았다.

일본의 기록을 보면 404년에 일본에 있던 전지왕자가 백제로 복귀하여 전지대왕이 되었다.
이때 동한
東韓(원산元山 추정)의 지배권을 전지왕자에게 주었고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학문을 가르치러 왔다.

역시 404년에 백제로부터 진한秦韓의 후예인 궁월군弓月君이 인솔했던 120현민縣民을 데리고 왔다.
진한
秦韓은 만주 요하遼河 하구에 있었고, 고구려의 점령 때문에 404년에 만주에서 피난해온 백제인들이다.

응신39년 427년에 백제 전지대왕?支大王은 누이 신제도원新濟都媛(백제 새 수도, 즉 황해도 평산의 대곡 한성의 여인이라는 뜻)을 천황에게 보냈다고 기록했다.

한편 404년 즉위한 백제 전지대왕?支大王(391~432)은 일본에서 대랑자大郞子 혹은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이라고 하였다.
의부부저왕이 아신대왕의 아들이자 계체천황의 증조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전지대왕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지대왕의 일본인 후예는 삼국군三國君, 파다군波多君, 식장판군息長坂君, 주인군酒人君, 산도군山道君, 축자미다군筑紫米多君, 포세군布勢君 등이 있다. 그외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임련林連도 전지대왕의 후손이다.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의 이름 뜻은 앞의 의부意富가 크다는 뜻의 대를 나타내며 뒤의 부저富杵는 우리말로 보시布施 혹은 부처다. 그는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생전에 보시를 많이 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그를 전지대왕 대신에 직지왕直支王이라고도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일본에 세운 절 이름인 치은사置恩寺와도 관련되고 직지直旨라는 불교 용어도 있다.

갈성葛城의 치은사는 의왕산醫王山, 혹은 포시산布施山이라고 부르던 곳에 있으며 치은사는 포시씨布施氏(전지대왕의 후예인 포세군布勢君과 동일)에 의하여 현재까지 1600년간 관리되어 전해내려왔다.

치은사


치은사 북쪽에 있는 이총고분二塚古墳이 바로 전지대왕의 고분이다. 전장 60m의 전방후원고분이며 현지에서 별명이 전취총?取塚이다.

전지대왕의 이름이 붙어서 전지총?取塚으로 아직도 고분 주인 이름이 전해오고 있는데 지금 아무도 그 전지총의 유래를 모른다. 하지만 고분의 묘비문에 나타난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이 백제 전지대왕이라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바 없으며, 비유대왕의 부왕이고 개로대왕의 조부이며 계체천황의 증조부가 된다.

전지총/ 전방후원고분이다.


포시산 성터

 

불교에 심취한 전지대왕은 왕비 팔수부인이 바람이 나서 왕권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
[삼국사기]에서는 419년에 전지대왕이 물러나고, 구이신왕
久爾辛王이 즉위하였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419년경에 백제 장수인 목만치木滿致(木?滿致)가 백제의 국정을 어지럽혔다.

목만치는 382년 왜국에 있던 침류대왕의 신하로서 신라를 쳤던 목라근자木羅斤子의 아들이다.
목만치는 전지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
八須夫人과 통정通情까지 하였다.

 

이에 423년경에 왜찬왕, 반정천황이 목만치를 왜국으로 소환하여 백제의 혁명적 사태를 수습하였다.
구이신왕은 도주하였는데 웅략 11년(469년)에 백제에서 도망쳐온 귀신
貴信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전지왕은 [삼국사기]와 다르게 419년에 죽지 않고, 423년경에 백제왕위에 복위復位하였다.

[송서宋書]의 424, 425년조에 전지대왕이 아직 살아서 백제대왕으로서 중국과 친서親書를 교환하고 있으니 복위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따라서 427년에 전지대왕이 왜찬왕, 즉 반정천황에게 누이 신제도원新濟都媛을 시집보낼 수 있었다.

425년에는 침류대왕의 아들인 송나라 문제로부터 백제왕이자 진동대장군으로 승진 책명을 받았다.
같은해 왜찬왕
倭讚王은 오히려 한 급 아래인 안동장군을 책명받았다.

427년에 비유대왕毗有大王(412~465)이 15세로 즉위하였다.

 

구이신왕(재위419~423)

구이신왕(久爾辛王)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8년(427)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14. 비유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