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응신천황이 된 근구수왕(재위 375~383)

 

신공황후를 데려온 근구수왕자(320~394)

제 14세 천황으로 기록된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은 근초고대왕인 일본무존의 아들이다.
중애천황은 왜국 중심인 오사카大阪에서, 걸대왕의 아들 성무천황의 반란을 당하여 355년에 큐슈九州로 쫓겨갔다.
성무천황은 중애천황의 큐슈
九州를 마저 공략하려고 하였다.
백제의 근구수왕자는 성무천황에게 차라리 신라를 치라고 권유하였으나, 성무천황은 굳이 큐슈로 향하여 여육
膐宍의 공국空國을 치러 왔다. 여육의 공국은, 혈육의 나라라는 뜻이니 중애천황의 땅 큐슈다.

이 성무천황의 큐슈 공격에 성무천황 후비인 신공황후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근초고대왕을 대신하는 주길대신
住吉大神 등이 남아있어서, 중애천황의 큐슈를 지켜주었고 백제군은 신공황후를 포로로 잡았다.

뒤이어 근구수왕자의 일본 본토 공격으로 355년에 시작된 성무천황의 반란은 362년에 평정되었으며 근구수대왕이 응신천황으로 등극하였다.
성무천황이 다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한 곳도 역시 걸대왕이 물러나 있던 시가
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다.
[고사기]에서 중애천황은 362년에 죽었는데, 이 기록은 성무천황이 362년 6월에 강제로 퇴위된 것을 의미하고, 이후로 성무천황은 시가
다카치호궁으로 물러나 370년에 죽었다. 중애천황은 355년에 큐슈로 물러나 379년경에 여생을 마쳤다.

응신천황은 신공황후의 새 남편으로서 근구수대왕이고, 태중에서 삼한왕이 된 신공황후의 아기는 우지노화기, 즉 백제 침류대왕이었으며, 침류대왕은 중애천황의 후사가 아니라 성무천황의 후사를 이엇다. 이 침류대왕이 경행천황과 성무천황의 시가국국 다카치호궁을 잇도록 하여 어린 침류대왕을 백자국 세자라고 근초고대왕이 하사한 칠지도에 기록하였다.

본래 응신천황은 호무다천황譽田天皇이라고도 하는데, 호무타화기品陀和氣命(320~394)로도 쓰고 본래 백제 근구수대왕이다.
응신천황
應神天皇(재위 362~367)과 호무다천황譽田天皇(재위 383~394) 두 개의 이름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가 두 번이나 천황을 지낸 것을 의미하고,응신천황으로서는 362년부터 367년이고, 예전천황으로서는 383년부터 394년까지다.

호무다品陀는 한전漢田, 즉 근초고대왕 이래 백제 수도 한산漢山을 의미한다.
호무다천황릉에 해당하는 오사까
大阪 예전어묘산譽田御墓山에는 근구수대왕이 묻혀있다. 320년에 태어나 394년에 75세로 죽었다.

응신천황릉/ 근구수대왕릉이다.

신천황릉/ 근구수대왕릉이다.

規模 単位:m

墳形

全長

後円部径

後円部高

前方部幅

前方部高

くびれ部幅

くびれ部高

年代

前方後円墳

415

256

36

330

35

188

35

5世紀初頭


 

근구수왕자는 362년 성무천황을 물리치고 나서, 성무천황의 황비였던 신공황후神功皇后를 만나 백제 본토로 데려갔다.
근구수왕자는 신공황후를 후비로 삼아서 아이부인
阿爾夫人이라 부르고 성무천황의 군대를 빼앗아 신라 정벌에 동원하였다.
근구수왕자는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략을 막고, 371년 고구려 북쪽의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371년 백제 근초고대왕은 지금의 평양 한산성 안학궁으로 천도하였고 374년에 붕어했다.

이후 근구수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는데,
383년에는 왜국에 건너가서 응신천황이 되었고, 대신에 원자인 침류대왕을 백제로 보내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게 하였다.

응신천황 근구수대왕은 394년에 74세로 왜국에서 서거하였다.

 

근구수대왕을 모셨던 신사로 추정되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남아있어서 구도신九度神과 팔번신八幡神, 주길대신住吉大神 등을 모시는데, 팔번신은 곧 침류대왕이다. 근초고대왕을 모시는 히라노平野神社에서 근구수대왕은 구도신九度神이라 하였다.

구도신사의 기록에서 구도신을 거북이신이라고 하고 또 어주신이라고 하는데久度大神の「久度」は、「窖」の意味であり、御厨の神
이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에게 소어신(小御神=황태자)이 만들었다는 어주(御酒)를 내려주기 때문이다.

오오사까에는 백제 구수대왕의 후손이라는 3가의 신사가 있다.
오진大津신사와 가라쿠니辛國신사(엄밀하게는 진사왕의 신사다.), 국분國分신사다.
여기서 오진大津신사는 오진應神천황과 관련되니 바로 구수대왕이었다. 응신應神을 오진大津이라고 읽는다.
오진大津신사의 기록; 特に百濟の貴須王の子孫と言われる葛井氏、船氏、津氏の三氏族が勢力を扶植していった。葛井氏は藤井寺市藤井寺の辛國神社、船氏は柏原市國分市場の國分神社、津氏は当社(=大津神社)とそれぞれ祖霊を祭っているようだが、明治以後であろうか素盞嗚尊や牛頭天王を祭る形になっている。

 

일본의 수많은 팔번신사八幡神社는 응신천황으로 잘못 알려진 침류대왕을 기리는 곳이다. 팔기군과 비슷한 팔번군이 있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스미요시대사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서
스미요시 대신과와 신공황후의 사통私通의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근구수대왕을 구수貴須라고 기록하였는데, 스미요시住吉 중의 뒷글자 길吉 한 글자 발음인 기사가 “貴地”와 같은 발음도 되거니와 吉을 기츠라고 읽을 수도 있다. 또 그 앞에 근(近; 큰-)을 구운炭의 의미로 적었다가 스미炭로 읽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근구수대왕을 위한 신사는 스미炭궁이어야 하는데, 같은 발음으로서 스미궁隅宮이라고 기록되었다.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이 서거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스미궁大隅宮은 본래 스미(炭, 隅) 요시(吉, 貴須), 즉 근구수대왕을 기린 궁이다.


근구수대왕을 모시는 주길대사. 원래는 백제 직할 일본 길비 주둔군 사령부였다.

 

신공황후神功皇后의 부친인 오키나가노숙녜息長宿彌命(321~384)는 개화천황開化天皇, 즉 왜여왕 일여壹與의 후손이다.
오키나가노숙녜의 딸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
息長帶比賣命, 신공황후神功皇后는 혈통적으로 여제사장이 될 자격을 타고났다. 그녀의 기도에 답하고 그녀를 수호한 것이 결국 응신천황應神天皇,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이다.

신공여황 고분 내의 명문 기록이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조작된 [일본서기]에 의한 능전陵前 기록만 있는데 289년부터 389년까지 101세나 살았다는 신화적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아비인 오키나가노숙녜(321~384)보다 먼저 태어난 기록이라 타당하지 않고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이나 성무천황成務天皇(326~370)보다도 30여세나 많아서 그들의 황후가 될 수 없다. 신공황후의 조작된 연대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데 신공황후의 숨겨진 본신本身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응신천황應神天皇(320~394)의 부인이 된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336~390)다. [일본서기]에서는 궁주택원宮主宅媛이라고 하였다.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
宮主矢河枝比賣도 그 근원이 와니씨和邇氏이고 오키나가씨息長氏도 그 근원이 와니씨和邇氏의 히코마쓰日子坐王으로서 똑같다.
궁주
宮主는 본래 후비后妃를 의미하는 고어다. 이미 왕에게 시집간 여자다. 즉, 성무천황의 후비 신공황후에 해당한다.
야가하에
矢河枝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근구수대왕비 아이부인阿爾 夫人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신공황후는 남장을 하고 활팔찌를 차고 다녔는데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불렀으니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가 신공황후다.
응신천황이 일본에 와서 그녀를 만나고 미모를 치하하는 노래를 남겼다.

그 노래 중에 그녀의 뒷모습은 방패
와 같다고 하였다. 後姿は 小楯ろかも
신공황후 고분의 이름이 방패
이 들어간 “순열릉楯列陵”이다.
또한 아이부인
阿爾夫人은 야가하에의 족성인 와니씨和邇氏를 의미한다. 와니씨는 우리 발음으로 와이가 된다.
362년경에, 성무천황의 황후로 간택된 26살의 오키나가타라시히메는 결혼후에 시가국으로 물러난 성무천황과 떨어져서 오사카의 본가에 돌아와 있었고, 그후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
宮主矢河枝比賣로 불린 것이다.
그녀는 성무천황의 대신이었던 타케우찌노숙녜
建內宿禰(266~371)를 만나서 속죄의 방법을 물었는데, 362년에 근구수왕자近仇首王子가 일본으로 와서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되었다.
근구수대왕의 후손으로 백제 일본천황이 된 왕들은 아래와 같다.

 

근구수왕자-응신천황은 신공황후를 보자마자 미모에 반하여 부인으로 삼았고, [삼국사기]에 근구수대왕비이자 침류대왕 모후로서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 기록되었다. [삼국사기/백제기]에 모후가 기록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서 온조대왕의 모후 소서노召西努와 구이신왕의 모후 팔수부인八須夫人, 그리고 아이부인 단 셋이다. 아이부인과 팔수부인은 일본 출신이라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고사기]는 신공황후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를 만나서 따르게 된 것을 강신降神으로 기록해 놓았다.
신공황후는 성무천황이 가졌던 일본의 중심인 오사카
大阪 대화大和의 영토를 다시 찾으려 하였으므로, 근구수왕자를 따라 백제로 가서 침류대왕枕流大王(363~422)을 임신하였다.

신공황후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길에 후쿠오까福岡에서 침류대왕을 낳았다.
그녀가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조작이다. [삼국사기]에서 363년경 “음력 여름 4월”에 신라에 왜병이 쳐들어왔지만 [신공황후기]는 겨울 10월에 공격하여 12월에 돌아와 출산했다.

여름
과 겨울, 4월과 10월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다. 또 신라가 겨우 복병 1000명으로 물리치는 정도의 작은 침입이었다.
실제 가능한 사실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가 4월에 동해안 항로를 이용하여 함흥의 백제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신라를 들리고 백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자와 함께 백제로 갔다가 임신하여 혼자 12월에 규슈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출산한 곳은 규슈
九州 후쿠오카福岡의 우미팔번궁신사宇美八幡宮神社 자리로서 일본의 팔번신八幡神이자 우치천황宇治天皇이 되었던 침류왕자를 출산하였다.


후쿠오카의 우미신궁과 신궁에 걸린 신공황후도

이때 신공황후는 침류대왕을 오데이왕男弟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앞서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일본 이름이 오구나男具奈였다.
한편 오사카에는 중애천황의 아들들이 있었다. 중애천황과 오호나가쯔히메
大中津比賣命(338~364)의 아들인 카고사카香坂王(357~386)과 오시쿠마忍熊王(360~387)가 가신들과 함께 신공황후의 오사카 입성을 방해하였다. 이들은 성무천황비인 신공황후에 반대하고 중애천황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신공황후는 이 반란을 제압하여 두 왕자를 중애천황 곁으로 유폐보냈다.

 

363년 응신천황(320~394)의 탄생신화는 응신천황이 아니라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363~422)의 탄생신화다. 침류대왕은 신공황후의 뱃속에서부터 신라군과 전투를 치러서, 태어날 때에 천황의 팔뚝에 활팔찌革丙처럼 굳은 살인 륙宍이 돋아있었다고 했다. 이를 륙생완상宍生脘上이라 기록했다. 즉 굳은살 륙이 팔에 박혀서 침륙枕宍왕이라 했다가 뒤에 침류대왕枕流大王으로 비슷하게 고쳐진 것이다.
침류대왕이 날 때부터 팔에 굳은 살이 박힌 원인은, 신공황후 오기나가
息長帶比賣가 전투복 차림으로 활팔찌를 차고 다닌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활팔찌는 활을 쏠 때에 왼팔에 차는 가죽 보호대다.
당시 활팔찌를 아예
阿叡라고 불렀으니, 아예를 차고다닌 신공황후를 백제에서 아이부인阿爾婦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활팔찌와 같은 굳은살을 차고 나온 천황을 활팔찌를 토모
革丙라고도 불러, 침류대왕을 오오토모大革丙 천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오오토모
大革丙는 그의 본 이름인 오오토男弟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신공황후가 태자를 위해 술을 빚었다고 하는  [주락가酒樂歌]가 있다. [주락가]에서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 상세의 소어신常世小御神이 술을 내렸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백제의 근구수황태자를 가리킨다.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는 수구나須久那의 어신御神으로 분석되며 수구나須久那는 초고대왕 이래의 함경도 함흥 주변 속고速古(=須久) 땅이 된다.

신공황후는 임신한 채로 일본에 돌아오는데 천황이 태내에 있을 때에, 천신天神이 삼한三韓의 통치권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한을 “가라”라고 읽어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삼한三韓이란 삼가라三加羅로서 대마도다.
인위가라
仁位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 계지가라鷄知加羅 삼국이다.
대마도 북도의 서북에 좌호천
佐護川이 있고 대마도 북도의 남쪽에 인위천仁位川이 있고 대마도 남도의 동북에 계지천鷄知川이 있다.

즉, 근초고대왕과 근구수태자는 태중의 침류대왕에게 대마도를 분봉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침류대왕의 소식을 듣고 칠지도
七枝刀를 만들어 보내며 왜왕 기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
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白髭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근초고왕의 한산시대 참조

363년 침류대왕 탄생과 신라 정벌, 364년 백제의 태화 개원, 그후 태화 4년 367년에 침류대왕을 왜왕으로 임명하기 위한 칠지도 제작이 맞아 떨어진다.이는 다음의 증거로 다시 확인된다.
383년 일본의 사마숙녜
斯馬宿禰가 백동거울인 인물화상경을 만들어서 침류대왕자인 남제왕男弟王에게 바쳤다.

일본 기이국紀伊國의 유물인 우전팔번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미년 8월일, 16왕년

남제男弟왕께서 의자사가궁(오오사까)에 계시는데,

사마斯麻가 남제왕께 길이 충성하는 마음으로 개중비치와 예인금주리 2인 등을 보내어 백상동 200근을 모아 이 거울을 만들어 바칩니다.

癸未年 八月日 十六王年, 男弟王 在 意紫沙加宮時, 
斯麻 念 長奉 遣 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 白上同 二百旱 作 此竟

사마斯麻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366년)에 나오는 왜국의 신하, 사마숙녜斯摩宿禰다. 따라서 계미년은 383년이다.

16왕년은 거울 속의 남제왕의 왕 16년, 즉 즉위 16년이며 계미년이다.


한편 이 기록은 왜국인 사마
斯麻에 의해서 왜국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남제왕
男弟王은 일본식으로 읽어서 “우데”로 읽어야 하는데,
응신천황과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
宮主矢河枝比賣의 태자는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郞子(367~396, 교정 363~422)라고 기록하였다.
우지
宇遲의 본래 글자가 남제男弟였던 것이고 남제男弟의 차자다.
[고사기] 등에서 우지노와케
宇遲能和氣는 바로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응신천황의 부인이 신공황후인 야가하에
矢河枝比賣고 그 아들이 우지노와케인 것이다.
한편 [풍토기
風土記]에서는 우지노와케를 우치천황宇治天皇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근구수대왕기록은 아래와 같다.


근구수왕(近仇首王)<또는 수(須)라고도 하였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의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고국원왕가 친히 쳐들어 왔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태자가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장차 싸우려 하였다.
고구려 사람 사기(斯紀)는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잘못하여 왕이 쓰는 말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하였다. 그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말하였다.
“저쪽의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을 채운 허위의 군사疑兵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을 좇아 나아가 쳐서 크게 이기고는 도망쳐 달아나는 자들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의 서북에 이르렀다.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여 말하였다.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많은 것을 구합니까?”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는 이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지금 이후에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 하였다. 그 곳에는 말발굽 같이 틈이 생긴 바위가 있는 데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태자의 말발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2년(376)에 왕의 장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맡겼다. 겨울 11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왔다.

3년(377)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쳤다.
11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5년(379) 봄 3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그 사신이 바다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름 4월에 하루 종일 흙이 비처럼 내렸다.
6년(380)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여름 5월에 땅이 갈라져 깊이 다섯 장, 너비 세 장이나 되었는데 삼일만에 합쳐졌다.

8년(382) 봄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으므로 왕이 나라의 곡식官穀을 내어 그것을 물러 주었다.
10년(384) 봄 2월에 해 무리暈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궁중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383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384년은 광개토왕비문이나 인물화상경으로 보아서 잘못된 것이다.


근구수대왕과 신공황후의 불상

12. 송나라를 세운 침류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