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9. 광개토왕 대방 시대ad391(영락)~ad412

추모왕

유리왕

대무신왕

태조대왕

차대왕

산상왕

중천왕

고국원왕

광개토왕

장수왕

평원왕

보장왕

보장왕2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은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개가 웅대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 고국양왕이 [재위] 3년에 태자로 삼았고, 8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광개토왕의 연호는 영락永樂이다. 따라서 영락태왕이라는 말로 불리웠다.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9월에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으며, 또 거란에 잡혀갔던 본국 백성 1만 명을 불러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다.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는 것은 <백제기>에서 석현성 등 10성이니 관미성은 그 남쪽이다. 석현성(石峴城)은 고이왕 때 중국 진출을 위해서 열병을 했던 석천(石川)과 관련된다. 즉 석천(石川)에 석현(石縣)이 있는 것이다.
신금시(新金市) 서남쪽에 석하진(石河鎭)이 있는데 석천으로 유력하다. 석하보성(石河堡城)이 있다. 
그 석하(石河)를 따라 올라가면 온가구성(溫家溝城)이 나오는데 설인귀와 싸운 온사문의 석성(石城)으로 고려된다. 서북쪽에는 고대 횡산현(橫山縣)이 있었는데 설인귀가 쳐들어왔던 곳이 바로 횡산이고 온사문을 잡았다는 곳이 석성이다. 
 

이 온가구 석성이 바로 백제 석현성으로 고려된다. 이 391년 석현등 10성의 공취는 미천왕 때 차지한 낙랑 땅인 요양시 패수로부터 남하하여서 신금시까지 요동반도 서해안을 거의 장악한 것이다.

관미성 공취는 석현성 공략 3개월 후에 이루어진다. 
석현성등 5성을 탈환하기 위해 아신왕의 장수 진무가 관미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므로 관미성은 석현성의 남쪽이 된다. 또한 일곱길로 공격한 것은 석하보 서남쪽의 칠정산진(七頂山鎭)  칠정산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관미성은 바로 칠정산이다.
 

2년(392)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아홉 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였다.
3년(393) 가을 7월에 백제가 침략해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 8월에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4년(394) 가을 8월에 왕은 패수(浿水) 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일본서기] 是歲,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일본에 간 근구수왕은 응신천황이 되어서 막내아들인 아신왕을 백제왕으로 임명했었는데, 말썽장이 아들인 진사왕이 찬탈했었다.). 故遣紀角宿禰.羽田矢代宿彌.石川宿彌.木菟宿彌,嘖讓其無禮狀. 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彌等便立阿花為王而歸.
한편 윗글에 석천숙네가 나오는데 그의 고향 석현성을 수복하러 원정갔을 것이다. 또한 그가 일본 땅에 석천현石川縣을 건설했을 것이다.
아신왕의 즉위 직후 관미성 탈환 작전은 이들 왜군의 연합작전이었으나 실패한 것이다.

백제의 고구려 평양성 공략은 근초고왕 때에 요양시 패하(백제 북계)에서 매복 반격하고서 패수 평양성 공략으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던 바가 있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성은 아래와 같다.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18)○○ 19)○○ 20)분이야라성 21)성 22)○○ 23)○○ 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31)소가성 32)돈발성 33)
○○ 34)○○ 35)루매성 36)산나성 37)루성 38)세성 39)모루성 40)우루성 41)소성 42)연루성 43)석지리성 44)암문지성 45)임성 46)○○ 47)○○48)○○ 49)○○ 50)취추성 51)○○○ 52)고모루성,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양성 56)○○  57)○○○라성 58)구천성 등을 쳐서 빼앗았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1)壹八城 2)臼模盧城 3)若模盧城 4)幹弓利城 5)○○城 6)閣彌城 7)牟盧城 8)彌沙城 9)古舍(조)城 10)阿旦城 11)古利城 12)利城 13)雜彌城 14)奧利城 15)勾牟城 16)古須耶羅城 17)頁18)○○19)○○ 20)分而耶羅城 21)城 22)○○23)○○24)○○ 25)豆奴城 26)沸 27)利城 28)彌鄒城 29)也利城 30)大山韓城
31)掃加城 32)敦拔城 33)○○34)○○ 35)婁賣城 36)散那城 37)婁城 38)細城 39)牟婁城 40)于婁城 41)蘇城 42)燕婁城 43)析支利城 44)巖門至城 45)林城 46)○○ 47)○○48)○○ 49)○○ 50)就鄒城 51)○○○, 52)古牟婁城, 53)閏奴城, 54)貫奴城, 55)三穰城 56)○○ 57)○○○羅城 58)仇天城

중국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의 전설에 봉황성은 영락태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참고하여야 한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봉황산성은 “영락대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기록이 있다.
비문 중의 위 기록에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오십사성을 공취하였다. 반면에 백팔성은 비문에서 광개토대왕이 처음 공격한 일팔성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백팔성은 108이란 근거가 없고, 고대의 일팔성이 백팔성으로, 다시 백팔성의 하나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58성에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을 첫번째로 포함시켜야 한다.
그후 백제가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는데, 이 백제 한수는 대동강이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대동강 대산한성(북한산성=근초고왕성)까지 내려온 것으로 확실시된다. 아신왕은 북한산성이 포위당하여서 탈출하고, 한수(대동강) 남쪽 한산성에서 항전하였던 것이다.

 

이어지는 [광개토왕 비문]에서는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왕성(30.대산한성=북한산성)을 함락하였으나, 백제왕은 항복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대동강)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항복하고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처음부터 친정을 나왔던 태왕이 건너간 아리수는 지금의 대동강으로 고려된다.

대산한성, 즉 북한산성이 함락되고서 고구려군은 대동강 서쪽의 여러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용강의 횡악성과 성천의 홀골산성등은 그대로 백제 영역이었다.

아무튼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로 요동반도와 대동강 이북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지배권이 넘어간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은 아래와 같이 비정된다.

1번) 일팔성壹八城은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鳳凰山城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한다. 성 둘레는 30여리에 이르는 대성이다.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쌓은 관방의 최북단인 팔곤성八坤城과 관련하여 그 서쪽의 봉황산성을 역시 관방성의 하나로서 일팔성으로 추정한다. 팔곤성은 팔하천八河川이라고도 부른 요동반도 단동시 애양현(~陽縣) 관수진灌水鎭의 고대보산성高臺堡山城으로 추정된다.
곤은 관과 고대모음 "아래아"로서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백제 팔곤성을 고구려에서는 곤팔성이라고 고쳐불렀는데 역시 백제 관방인 팔일성도 일팔성으로 고쳐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백제 관방이나 국경에 팔八자가 들어가는 일이 많다. 팔령, 팔령천 등이 그렇다.
따라서 일팔성은 봉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봉황성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고향이라고도 전하는데 연개소문에 이르러 현재 규모로 커졌을 것이다.

2번) 구모로성臼模盧城은 수암현岫巖縣 동북쪽 황화전黃花甸의 노성구산성老城溝山城이다. 성 둘레는 약 3리이다. 대양수大洋水의 동쪽 가지에 있는데, 동쪽 가지 계곡을 구곡九谷이라 하며 이는 구곡舊谷의 변형이다. 부근의 송수구산성松樹溝山城은 성 둘레가 5리인데 고구려 때 쌓은 것으로 고려된다.

 

3번) 약모로성若模盧城은 애하 변의 구련성九連城으로 추정한다.

여기까지 3성은 압록강 북쪽에 있고 이후 성들은 압록강 남쪽에 있다.


4번) 간궁리성幹弓利城은 의주시 동남쪽 20리에 있었던 전문령箭門嶺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간궁리성의 간궁幹弓을 뒤집으면 궁간弓幹이 되는데 평안북도 의주 동쪽 삼림森林에서는 활의 재료가 되는 궁간목弓幹木을 생산하였다. 궁간은 활대를 말하며 전문령의 전箭은 화살을 말하여 서로 유사점이 있다.

이 전문령고성은 의주 동남 20십리에 있던 토성으로서 백제 초기 토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성 둘레는 11600척(4000m)이고, 62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문령고성의 현재 위치는 의주시 송산동松山洞, 대문리大門里 부근이 된다.

송산동은 금강산과 횡금산 사이에 위치하여 있는데 금강산(金剛山,524m)은 조선시대 송산松山이었다. 간궁산, 궁간산弓幹山으로부터 금강산金剛山이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궁간목은 청천강 이북에서 주로 생산된다. 간궁리성은 의주를 통할하던 백제 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번) ○○○ 무명성은 모수성牟水城으로 추정하며 의주 서남쪽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현재는 고구려성으로 분류되는데 백제가 먼저 쌓은 것이다. 백마산성은 토성土城으로서 내성 둘레가 2590m이고, 외성 둘레는 2430m인데 외성은 조선시대에 세웠다. 


다음은 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으로서 피현군枇縣郡 용골산성의 위치인데 고구려군은 모수牟水(=三橋川)를 건너지 않고 동쪽으로 갔다.

6번) 각미성閣彌城은 천마군天馬郡 각구봉角拘峰 남쪽 고영삭진古寧朔鎭으로 추정한다. 토성이 있었다.

 

7번) 모로성牟盧城은 천마군 식송진植松鎭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문곡산門谷山 아래인데 모로를 문곡으로 바꾼 것이 된다.

8번) 미사성彌沙城은 천마군 서고성西古城터로 추정한다. 서고성은 승암산 아래인데 미사彌沙가 사미로 뒤바뀌었다. 사미沙彌는 20세 이하의 어린 남자 승僧을 의미하므로, 다시 현재의 승암산僧巖山으로 바뀌었다.


9번) 고사조성古舍조城은 선천군 동림성東林城으로 추정된다. 석축과 토축이 함께 있으며 그 둘레는 17560척이다. 고선주성古宣州城이었다. 사조가 축약되어 선주宣州로 되었다. 수묘인을 바친 사조성舍?城은 철산군鐵山郡으로 추정한다.

10번) 아단성阿旦城은 선천군宣川郡 대륙산大陸山으로 고려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아단성은 없고 아차성阿且城만 두 번 나온다. 책계대왕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위례성(평안남도 성천 홀골성)을 수리하고, 사성(동해안 정평군 세류고성) 등과 함께 쌓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끌려가서 죽은 곳이다. 고구려의 기록이 아단성이지만 본래가 백제 아차성의 오기誤記로 추정한다.

아단성과 함께 수묘인을 공출한 잡진성雜珍城은 선천군 검산성劒山城으로 추정된다.


11번) 고리성古利城은 곽산군郭山郡 읍성이다. 곽산성, 또는 능한산성凌漢山城이라고도 하였다. 석성으로서 성 둘레는 6913척이다. 곽산군郭山郡은 고려시대 장리현長利縣이었던 기록이 있다.

 

12번) 무명성利城은 어리성於利城으로 추정한다. 능한산성이 당어령堂於嶺에 있으므로 그 아래는 어리성으로 추정하였다. 정주군定州郡 서주리西州里에 위치한 성동산성城洞山城으로서 성 둘레는 3만척에 달하는 토석성土石城이다.

 

13번) 잡미성雜彌城은 정주군 남쪽 제석산帝釋山에 위치한 성 둘레 7000척의 육지고성育地古城이다. 정주군 오산리五山里에 있으며 현재는 익주성益州城이라고 한다.

육지성이 익주성으로 변한 것이다. 이 산성은 고구려 때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백제 고성도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동쪽은 운전군雲田郡 봉두산성鳳頭山城, 즉 구모객두성句牟客頭성인데 고구려군은 이를 지나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14번) 오리성奧利城은 구성군 오봉면 조양리 고성지古城池로 추정한다.

태천군을 흐르는 오지천천烏知遷川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구성군 남쪽 30리에 고성지古城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오리성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위치는 오봉면 조양리이다. 구성군 기룡리氣龍里에 니성泥城이 있다. 그 부근 지명에 “어미 역驛”과 “엄교嚴橋” 등이 있는데 어머니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 수묘인을 바친 오리성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즉 구성군 오봉면의 오리성이 기룡리에 옮겨져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방언이 오마니이다.

 

15번) 구모성勾牟城은 운전군 목우산(牧牛山,416m)은 구모산을 뒤집은 이름이다. 또한 수묘인을 공출한 구모객두성句牟客頭城은 운전군 가산리 봉두산성鳳頭山城으로 추정한다. 봉두산성은 석성이며 성 둘레는 9067척이다. 구모객두는 환12국의 하나인 구모액국句牟額國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혹은 구모객두의 기록이 옳고 《단군세기》가 환12국의 이름을 옮겨적으면서 구모액국으로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16번) 고수야라성古須耶羅城은 대관군大館郡의 읍성 위치에 있던 대삭주성大朔州城으로 추정된다. 성 둘레는 4615척의 석성이었다.

 

17번) 무명성頁은 수추성須鄒城으로 추정하며 대관군 수동면水洞面 용성리龍城里 위치로 추정된다. 첫 글자에 분명 혈頁자가 보이는데 이는 고어체에서 수首를 대신한다. 

 

1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귀성군(龜城郡) 북쪽 굴룡산 산성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50척이었다.

 

1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귀성(龜城)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1만2335척이다.

 

20번) 분이야라성分而耶羅城은 두 강역을 나누는 성으로 추정한다. 태천泰川의 동쪽, 퇴라산고성退羅山古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6674척이다. 퇴라산은 지령산(地靈山,300m)로 바뀌었다. 

 

21번) 무명성성은 알 수 없다.

22번) 무명성○○은 박천군博川郡 박릉성博陵城 위치로 추정된다.

2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안주읍 고성은 석성으로서 6050척이었다.

2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25번) 두노성豆奴城은 문덕군 대니면 마두산(馬豆山,536m)의 서쪽 일대로 고려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주둔한 마읍산馬邑山도 이곳이다. 고려 때에 안술진安戌鎭, 혹은 安仁鎭이라고 쌓은 해변토성海邊土城의 위치로 보며, 당시에 성 둘레가 2490척이다.

 

26번) 비성沸城은 숙천군肅川郡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050척의 토성이다.

 

27번) 무명성()利城은 비리성比利城으로 추정한다. 숙천군肅川郡의 접무봉(蝶舞峰,340m) 남쪽, 호전성虎田城이다. 숙천읍 동쪽 20리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호전성은 토성으로서 성 둘레는 9710척이다.

비리는 피리로 읽어서 한자어로 호적胡笛으로 바뀌어 다시 호전성虎田城으로 바뀌었다. 호전성의 산봉우리는 역시 피리봉을 바꾼 호적봉에서 호접봉胡蝶峰이라고 바뀌어서 다시 오늘날의 접무봉蝶舞峰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현재의 접무봉과 접무봉 기슭 아래 호전성은 둘 다 한자어 호적胡笛, 즉 우리말 피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28번) 미추성彌鄒城은 평원군 영유현 위치의 태조산 남쪽 미두산성米豆山城으로 추정하였다. 미두산성은 토성으로서 둘레는 4380척이다.

둘레가 1820척이 되는 고소토성古小土城이 영유현 자리에 있었는데 온조溫祚 도래 당시의 미추홀이고, 미추산성은 비류의 후예들이 도래하여 지어진 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29번) 야리성也利城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추정한다. 평성시 어중리御重里에 있다. 성 둘레는 5Km이며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대성이다.

내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내성이 백제 성으로 추정된다. 아리, 또는 야리는 다 알을 어원으로 하며 어머니를 의미한다.

미추성이 바라보이는 자모산성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부아악負兒岳으로 추정하는데, 부아악의 뜻은 아이를 업은 자애로운 어머니 산이다.


30번) 대산한성大山韓城은 백제 국성이었던 대동강의 북한산성 안학궁이다.

 

31번 이하는 대산한성 안학궁이 함락되면서 대동강 이북에 위치해서 항복해서 얻은 성들일 것이다.

 

31번) 소가성掃加城은 평성시 소사산(蘇射山,354m)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하는데 그 북쪽에 니성泥城이라는 성 둘레 1250척의 작은 토성이 있었다.

32번) 돈발성敦拔城은 한자를 풀어서 발이 족足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대성산성 북쪽의 대동군 자족면紫足面이 된다. 돈敦이 돈豚, 시豕, 시柴, 자紫로 바뀌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대성산성 동북쪽 산사면에 대성산성과는 다른 토성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토성 둘레는 5160척이라고 하였다.

이 토성의 위치가 바로 자족면紫足面이며, 백제가 쌓은 토성으로서 돈발성으로 추정된다. 즉 대성산성의 전신이다.


3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5번) 루매성婁賣城은 청암동 토성이다. 노성魯城이라고도 하였다.

36번) 산나성散那城은 고방산 산성高坊山 山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Km이다.

37번) 무명성○婁城은 청호동 산성淸湖洞山城으로 추정한다.


38번) 세성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손자산(孫子山,356m) 남쪽 삼성리三成里로 추정한다. 고성은 알 수 없다.   

39번) 모루성牟婁城은 평성시平城市 한왕리漢王里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40번) 우루성于婁城은 첫자가 희미하지만 대개 우루성으로 해석한다.

우륵지于勒池가 있던 평원군 노지면 대주리大州里로 추정한다. 우륵지는 거문고를 타는 가야인 우륵이 왔던 곳이 아니라 우루지于婁池의 와전으로 추정된다. 우루지에 고성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41번) 城은 증산군甑山郡 함종면咸從面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석성이며 성 둘레는 4334척이다. 산성도 있는데 역시 석축이며 2246척이다. 함종咸從은 비류의 백성들이 비류가 죽고 온조 땅에 건너올 때 낙종樂從했다는 백제 건국기의 기록과 관련될 것으로 본다.


42번) 연루성燕婁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어을동토성으로 추정한다. 황룡산성은 오석산(烏石山,566m)을 중심으로 쌓은 성 둘레 6620m의 대성이다. 그 서쪽의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은 성 둘레 1212척의 토성으로서 평산군 신사비가 발견된 곳이다.

43번) 석지리성析支利城은 용강군龍岡郡 삼화읍 고성三和邑 古城으로 추정한다. 토축이며 성 둘레는 4630척이다.

44번) 암문지성巖門至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암성면巖城面이다. 암성리巖城里가 남아 있다. 고성은 알 수 없다.

 

45번) 임성林城은 평안북도 염주군鹽州郡 성림성城林城으로 추정한다.

46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7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무명성()()()은 잡진성雜珍城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선천군宣川郡 검산성劒山城이다.

4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0번) 취추성就鄒城은 알 수 없다.

51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2번) 고모루성古牟婁城은 알 수 없다.

53번) 윤노성閏奴城은 알 수 없다.

 

54번) 관노성貫奴城은 압록강 북쪽 관전현(寬甸縣)으로 추정된다.

55번) 삼양성三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삼성동으로 추정된다.

 

56번) 무명성○○은 미성味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약산성藥山城으로 추정한다. 영변읍 고성은 철옹성으로서 4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성 둘레 1Km의 약산성藥山城 고성으로 추정한다. 영변은 밀운密雲성이라고도 하였었다. 그래서 미성이었을 수 있다.

 

57번) 무명성()()()羅城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고무주성(古撫州城)으로 추정된다. 토성으로 성둘레는 5947척이다. 영변군에는 단군시대 모한(慕韓)이 있었다.

 

58번) 구천성仇天城은 순천시 은산殷山이다. 북쪽 천성산天聖山이 구천성仇天城이 된 것이다. 구천성은 은산의 고읍성으로 추정되는데 토성이며 성 둘레는 5168척이고 우물 9개와 연못 3개가 있었다. 천성산 꼭대기에 고구려, 백제 시조 동명왕의 마적馬跡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온조대왕의 마적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수묘인 공출은 다음 36성에서 있었다.

1)한예 사수성韓穢沙水城 2)모루성牟婁城 3)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 4)구모객두句牟客頭 5)구저한求底韓 6)사조성한예舍蔦城韓穢 7)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8)막고성莫古城 9)객현한客賢韓 10)아단성阿旦城 11)잡진성雜珍城 12)파노성한巴奴城韓 13)구모로성臼模盧城 14)약모로성若模盧城 15)모수성牟水城 16)간궁리성幹弓利城 17)미추성彌鄒城 18)야리성也利城 19)두노성豆奴城 20)오리성奧利城 21)수추성須鄒城 22)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 23)대산한성大山韓城 24)농매성農賣城 25)윤노성閏奴城 26)고모루성古牟婁城 27)탕성湯城 28)미성味城 29)취자성就咨城 30)삼양성彡穰城 31)산나성散那城 32)나단성那旦城 33)구모성勾牟城 34)어리성於利城 35)비리성比利城 36)세성細城


수묘인은 고구려 내지 이외의 곳에서 많이 추렸는데 이는 백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처음에 소개된 한예는 백제의 북쪽이며, 당시에 백제에 속했어도 본래 백제가 아니라고 고구려가 구별한 것이 된다.

따라서 수묘인 공출은 만주 요동반도와 396년 정벌전에서 제외된 함흥 지방, 그리고 숙신, 북부여 등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군은 중국 환인(桓仁) 부근에서 출정하여, 봉성현을 치고 수암현을 친 다음에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쳐내려가서 대동강을 경계로 진격을 멈추었다. 이 광개토대왕廣開土王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대동강 이북땅을 고구려에 내주었다.

아신대왕은 396년 7월 대동강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였는데 광개토대왕의 정벌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아신대왕은 397년 한산의 북책까지 올라가다가 돌아왔는데 이는 대동강을 따라서 한산의 동북쪽에 있는 순천시 은산殷山까지 올라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개로왕이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사성을 수리하고 사성의 북쪽 숭산崇山까지 방죽을 쌓았는데 이 숭산도 순천시 은산의 숭화산이다.

즉 당시 고구려 백제의 경계가 남쪽으로 대동강이며 동북쪽으로도 대동강의 가지인 영원군 성룡강成龍江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로왕은 말기에 동북의 말갈국과 함께 고구려를 같이 치기로 협상한 사실이 《위서 물길전》에 나온다.

 

한편 395년에 광개토왕은 거란 정벌을 하였다. 이는 아리모려묘지에서도 확인된다.
영락5년 395년에 태왕은 비려가 안정하지 못하므로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을 나가 부산, 부산을 돌아 염수위에 있는 근거지를 깨트리고 여섯 개의 대부락과 칠백개의 마을을 쳐부수고 빼앗은 소와 말,양들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이 많았다. 태왕은 군사를 돌려 환국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태왕은 망평도를 지나가기 위해 류성과 력성 북풍성 등을 거쳤다. 대왕은 미리 사냥을 준비하여 국경도 돌아보시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오셨다.  

維昔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爭又 躬率往討 回富山負山 至鹽水上破其丘, 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 [望-형태로서 추정]平道 東來,[柳-우변 일부만 보인다.]城,力城,北豊. 王備獵游觀土境田獵而還
여기서 류성은 조양시에 있던 용성이다. 이때 395년에 북연의 용성을 지키던 창려태수가 전사하였다. 조양시에 창려태수 최휼 묘지로 남아있다. 
부산
富山은 조양시 서쪽 건평현이다. 역성力城은 구려성으로 고려되고 북풍성은 그 남쪽 상풍(常豊)으로 고려되는데 한무제가 설치한 양평이다.

<삼국사기>
9년(399) 봄 정월에 왕은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연나라 왕 모용성이 우리 나라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했는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南蘇城)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부신시 서북쪽 교래하 상류를 빼앗긴 것이다.

한편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399년에 광개토왕은 신라를 응원하였다.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동황성)에서 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 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협보
(유리왕 때 남한으로 감)의 후예인 안라인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이때 광개토왕은 왕자 고진을 보내어 대마도를 거점으로 임나일본부까지 만들었다. 왕자 고진은 417년에 시코쿠에서 인덕천황을 죽이고 432년에 오사카로 들어가서 윤공천황으로 등극한다.

11년(401) 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연나라 평주자사는 조양시를 관할한다. 대릉하의 의현 부근으로 고려된다.
13년(403) 겨울 11월에 군대를 내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14년(404) 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침공해 왔다. 성이 함락되려 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먼저 성에 오르지 말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서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엄히 방비할 수 있어서 연나라는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북연황제 모용희(385~407)는 401년 16세에 황제가 되었고 이때 고작 당시 19세로서, 391년 18세에 왕이 되어 30세가 된 광개토왕보다 10여세나 더 어렸다.

한편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이해에 백제의 공격을 평양성에서 받았는데 이를 분쇄하여서 백제 아신왕이 쫓겨났다.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 왕당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대방계가 요동반도 서남해안으로 기록되었다.

이때 적어도 압록강까지는 백제가 수복했다고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평양에서의 패배로 군대를 많이 잃었고 패전 책임으로 다시 퇴위하고 일본으로 갔다.

15년(405) 가을 7월에 누리가 날아들고 가뭄이 들었다. 겨울 12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北)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6년(406) 봄 2월에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17년(407)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의 정]을 베풀자 북연 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갈래로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였을 때 운이 무예로써 동궁에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고화는 환도성 함락 때 끌려간 고구려 장수이고 고운은 그 손자이다. 397년에 모용보 황제가 황위계승 다툼으로 인하여 태자 자리를 요구하는 서장자인 모용회에게 용성에서 포위되었을 때 고운이 돌격대를 이끌고 성을 나가서 포위를 풀고 모용회를 격파해서 모용보황제의 양자가 되었다.

407년에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고구려는 보기병 5만을 보내서 신라군과 연합하여 가야을 쳤다.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를 보내어 .... 합전하여...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佳城,○○○,○○○,나○성 등을 빼앗았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那○城.

18년(408) 여름 4월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民戶를 옮겼다. 8월에 왕은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이때 408년에 백제 유주자사를 지낸 부여진이 죽어서 평양 덕흥리에 묻힌다. 그러나 그는 고구려 관직을 받았고 영락 연호를 사용했으니 고구려에 투항한 백제 왕족이다.

22년(412)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광개토왕은 미천왕 때 차지한 요양시 태자하(근초고왕의 패하)로부터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대동강까지를 영토로 확장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일본을 쳐서 대마도와 규슈에 임나연정을 만들었고 이를 다스리던 광개토왕의 아들 고진은 일본에 가서 윤공천황이 되었다. 이는 <윤공천황편>에 자세하다.

[광개토왕비 전문]

옛적에 시조이신 추모왕이 고구려 나라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모후는 하백의 따님이셨다.

추모왕은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내려오시니 성덕이 높았다.

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德

추모왕은 모후의 명을 받아 동부여를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추모왕은 나루터에서 말하였다.

“황천의 아들이오,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 왔다. 나를 위하여 갈대배를 만들어 띄워라.”

자라가 듣고 즉시 갈대배 만들어 건너게 해주어 추모왕이 강물을 건넜다.

鄒牟王 奉母命駕 巡幸南下路 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爲我連葭 浮鼈應聲 卽爲連葭浮鼈 然後造渡


황천은 하늘에 대한 극존칭이다. 즉, 천손을 강조한 것이고 하백은 물의 신이다.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 엄호수, 엄사수 등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개사수라고도 했는데 고대에는 개사수, 혹은 엄리대수라고 불렀다. 지금의 통유현通楡縣 곽린하霍林河다. (3부 2장 2절 참조)

동부여에서 고주몽의 모후인 유화柳花부인 묘(통유현 전장포毡匠鋪 고묘 추정)를 개사수에 세우니 훗날 엄니(=어머니)대수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한단고기-북부여기]에서는 유일하게 분릉수岔凌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송화강의 지류 나린하拉林河의 난릉蘭凌 부근을 의미하며 나린하는 내린천으로서 보통 부여의 중심 물이름이다. 나린하 상류에 서란舒蘭이 있고 고주몽이 태어난 곳이라고도 전한다.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에 의해 동북으로 쫓겨난 북부여가 세워진 동부여 위치로서 나린하는 타당하다. 동부여가 가섭원 또는 분릉하에 세워졌다는 [한단고기-가섭원부여기]에 의하면 가섭원의 중심이 분릉수였다.[광개토왕 비문]에서 고주몽이 태어난 곳이 북부여인데, 즉 천산의 북부여 출발지로부터 흑룡강성 나린하도 북부여였고, 그리고 위나라 때는 눈강嫩江 동쪽 흑수지역까지 북부여다.

따라서 고두막한 졸본부여에 의해 천산에서 밀려난 북부여는 흑룡강성 나린하에 자리잡았다가 고주몽이 태어난 후에 조남시 부근으로 돌아왔고,

고주몽이 그곳에서 말지기를 하다가 도망쳤고, 그후 동부여는 대무신왕 때에 망하여 다시 흑룡강성으로 옮겨간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곡에 이르러 홀본의 서성, 산상에 성을 지어 도읍을 삼았다.

그러나 불락한 때에 황룡이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산 위에서 용머리에 올라타고 승천하였다.

於沸流谷 忽本西城 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龍負昇天


추모왕이 정했던 세자 유리왕은 도덕정치로서 다스려 나라가 흥하였다.

대무신왕은 뒤를 이어 더욱 번성하게 하였다.

주류왕의 십칠세 후손왕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즉위하여

연호를 영락이라 정했다.

태왕의 은택이 세상에 두루 미치고 그 위엄은 사해에 떨쳤고 악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고 업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오곡이 풍족하였다.

태왕은 39세에 붕어하셔서 떠나시게 되었다. 414년 9월29일에 산릉을 완성하여 옮기시게 되었다. 왕릉위에 비석을 세워 태왕의 훈적을 새겨 두니 이를 후세에게 전하는 바 아래와 같다.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乘基業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 皇天 威武 橫被四海 掃除○○庶寧 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三十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 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積 以示後世 焉其詞曰


대무신왕의 17세 후왕인 광개토왕은 二九세, 즉 18세에 즉위하였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을미년395년이 영락 5년, 병신년396년이 영락 6년이었다는 기록에 의하면 그의 즉위년도는 391년 신묘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재위 22년에 붕어하였는데 겨울 10월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의 즉위년도가 392년으로, 붕어년도는 413년으로 각기 1년씩 뒤로 미루어져 있다. 이는 장수왕長壽王의 즉위년도까지 1년 늦추어 놓았고 그 이후 장수왕의 붕어년도부터 다시 맞는다.

414년이 되는 갑인년 9월29일에 광개토왕릉이 완성되었고 그날 천장遷葬하였다. 장수왕長壽王 즉위 3년이 되는 해이다.


영락5년 395년에 태왕은 비려가 안정하지 못하므로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을 나가, 부산, 부산을 돌아 염수 위에 있는 근거지를 깨트리고, 여섯 개의 대부락과 칠백 개의 마을을 쳐부수고 빼앗은 소와 말, 양들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이 많았다.

태왕은 거기서 군사를 돌려 환국하시었다. 이때, 태왕은 [망]평도를 지나가기 위해 동쪽으로 오는 길은, [유]성, 력성, 북풍성 등을 거쳤다. 대왕은 미리 사냥을 준비하여 국경도 둘러보시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오셨다.

維昔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爭又 躬率往討 回富山負山 至鹽水上破其丘, 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 [望-형태로서 추정]平道 東來,[柳-우변 일부만 보인다.]城,力城,北豊. 王備獵游觀土境田獵而還


비려碑麗는 선비족 후연에 복속당한 거란족의 중심 지방 이름으로 추정된다. 영락 5년은 395년으로서, 선비鮮卑족 모용씨의 후연국後燕이 중산中山에 근거하던 때다. 광개토왕은 즉위하던 해인 391년의 백제, 거란 정벌 이후에는 환도성을 침략했던 선비족의 연나라에 대한 복수가 과제였다. 따라서 그 배후인 비려 지역, 노합하 상류 지역을 먼저 복속한 것이다.

모용외慕容廆는 도하徒河 청산靑山 아래 대극성大棘城을 건설하여 전연의 최초 수도로 두었다. [한단고기]에서 [통지-씨족략]을 들어서 치우씨蚩尤氏의 고향이 대극성大棘城이라고 하였다. 치우의 고향은 부신시 자도대紫都臺 평정산 석성로서 망우하牤牛河 변이다.

위만조선 시대 연나라 요서군 도하徒河는 전한시대 유성, 양락 등과 관련되어서 육주하六州河 부근으로 고려되는데, 기자箕子의 수유성須臾城이 육주하에 있었으니 기자의 무리로 인해 도하徒河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손탁이 자립하여서 요동국을 만들 때에 기존의 후한 요서에서 훨씬 동쪽에 요서군이 새로 만들어진다. 한무제시대 요동군에서 밀려난 후한시대 요동군 양평성은 소릉하 대집둔에 있던 연나라 시대 요동군 양평성인데, 이를 바탕으로 공손탁이 새로 만든 요동국 양평성은 금주시 의현 북전성자고, 그때 요동군을 갈라서 만든 요서군의 도하는 그 서북쪽 자도대 부근이라서 치우의 고향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한편 이때 만들어진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오늘날의 조양시 유성이고 그 이전의 전한시대, 연나라 유성, 양락 등은 모두 육주하 서쪽이다.    

모용황皝은 342년에 화룡성和龍城(=조양시朝陽市)에 도읍하였고, 357년에 모용준儁은 중산中山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업성鄴城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전연은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에게 패망하였다. 이후 부견이 383년 동진과 전쟁에서 패전하자 모용수垂가 독립하여서 386년에 중산中山에서 후연국後燕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나 396년 모용수가 죽으면서 탁발선비 위나라에 밀려서 대릉하大凌河 화룡성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모용보寶가 모용수의 뒤를 이었으나 3년만에 살해되어 모용성盛이 이었고 모용성도 2년만에 죽었다. 이 뒤 399년에는 모용희熙가 이었고 407년에는 모용운雲이 뒤를 이었다. 모용운은 342년 모용황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킬 때 고구려에서 끌려간 고씨高氏의 후예로서 고운高雲이라고도 하며 광개토왕과 한 종족의 교분을 맺었다.

한편 395년은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와 북위北魏 탁발규拓跋珪간에 산서성과 하북성에서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 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선비족 모용씨의 배후 근거지 화룡성까지 쳤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우회하였다.

부산富山은 170년경 공손탁이 정벌을 나간 곳이며, [원일통지]에서 대녕로 용산현 남쪽 130리에 부산富山이 있고 용천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양시 건평현建平縣 부산향富山鄕이다.

공손탁은 170년에 현도소사였고, 당시 후한의 현도가 노룡-유성지간盧龍- 柳城이니 하북성 무녕현撫寧縣 부근이다. 뒤에 요동태수가 되었던 후한의 요동군 양평은 소릉하小凌河의 대집둔臺集屯 고성이다.

이곳 건평현의 부산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구려 서부 서요하西遼河에서 노합하老哈河로 내려가야 한다.

부산負山은 알 수 없다. 염수상鹽水上 파기구破基邱했는데 염수鹽水로 추정하는 서요하西遼河변의 통료시通遼市 개로현開魯縣 지역으로 고려된다.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은 전연국의 두 번째 수도이자 후연국의 수도가 된 유성柳城, 즉 화룡성을 치기 위해 고구려의 서쪽 국경을 넘지 않고 북쪽으로 돌아서 노합하를 타고 우회한 것이다. 광개토왕은 391년 거란 정벌로서 서요하를 이미 확보하였고, 395년에는 서요하西遼河에서 서남진하여 유성의 서부를 먼저 장악하고서 동쪽으로 귀환하면서 유성을 쳤다.

이때 유성을 지키던 후연국의 창려태수 최휼이 죽었다. 그의 묘비가 조양에서 발굴되었는데 395년 사망하였다. 그 묘비는 단 15자로서 아래와 같다. “연건흥십년(395년), 창려태수(조양시, 즉 비문의 유성) 청하동무성(최휼의 본향) 최휼  /  燕建興十年 昌黎太守 淸河東武 崔遹”


다음으로 력성, 북풍은 요동군에 속했으며 의무려산醫巫閭山 부근이 되고, 고구려의 영토다. 역성은 여양閭陽으로 고려된다. 대개 신창현과 평곽현 사이에서 소개되는데 여양현이 그 사이다. 북풍北豊은 전한의 양평으로 고려되는데 흑산현黑山縣 부근이다.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하여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 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 隨破新羅 以爲臣民

왜국이 백제를 깼다는 것은 391년에 근구수왕(응신천황)의 명령으로 진사왕을 사로잡아간 일을 말한다.

391년에 고구려에 패전한 백제는 왕위를 찬탈한 진사왕을 바꾸어 아신왕으로 다시 세우고 왜군의 지원까지 받아서 고구려를 쳤다.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18)○○ 19)○○ 20)분이야라성 21)성 22)○○ 23)○○ 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31)소가성 32)돈발성 33)
○○ 34)○○ 35)루매성 36)산나성 37)루성 38)세성 39)모루성 40)우루성 41)소성 42)연루성 43)석지리성 44)암문지성 45)임성 46)○○ 47)○○48)○○ 49)○○ 50)취추성 51)○○○ 52)고모루성,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양성 56)○○  57)○○○라성 58)구천성
등을 쳐서 빼앗았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1)壹八城 2)臼模盧城 3)若模盧城 4)幹弓利城 5)○○城 6)閣彌城 7)牟盧城 8)彌沙城 9)古舍(조)城 10)阿旦城 11)古利城 12)利城 13)雜彌城 14)奧利城 15)勾牟城 16)古須耶羅城 17)頁18)○○19)○○ 20)分而耶羅城 21)城 22)○○23)○○24)○○ 25)豆奴城 26)沸 27)利城 28)彌鄒城 29)也利城 30)大山韓城
31)掃加城 32)敦拔城 33)○○34)○○ 35)婁賣城 36)散那城 37)婁城 38)細城 39)牟婁城 40)于婁城 41)蘇城 42)燕婁城 43)析支利城 44)巖門至城 45)林城 46)○○ 47)○○48)○○ 49)○○ 50)就鄒城 51)○○○, 52)古牟婁城, 53)閏奴城, 54)貫奴城, 55)三穰城 56)○○ 57)○○○羅城 58)仇天城

중국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의 전설에 봉황성은 영락태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참고하여야 한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봉황산성은 “영락대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기록이 있다.
비문 중의 위 기록에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오십사성을 공취하였다. 반면에 백팔성은 비문에서 광개토대왕이 처음 공격한 일팔성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백팔성은 108이란 근거가 없고, 고대의 일팔성이 백팔성으로, 다시 백팔성의 하나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58성에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을 첫번째로 포함시켜야 한다.
그후 백제가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는데, 이 백제 한수는 대동강이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대동강 대산한성(북한산성=근초고왕성)까지 내려온 것으로 확실시된다. 아신왕은 북한산성이 포위당하여서 탈출하고, 한수(대동강) 남쪽 한산성에서 항전하였던 것이다.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왕성(30.대산한성=북한산성)을 함락하였으나, 백제왕은 항복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대동강)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백제왕에게 항복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처음부터 친정을 나왔던 태왕이 건너간 아리수는 지금의 대동강으로 고려된다.

대산한성, 즉 북한산성이 함락되고서 고구려군은 대동강 서쪽의 여러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용강의 횡악성과 성천의 홀골산성등은 그대로 백제 영역이었다.

아무튼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로 요동반도와 대동강 이북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지배권이 넘어간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의 비정은 위의 본문 중에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군은 본계소시 부근에서 출정하여, 봉성현을 치고 수암현을 친 다음에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쳐내려가서 대동강을 경계로 진격을 멈추었다. 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대동강 이북땅을 고구려에 내주었다.


백제 아신왕은 396년 7월 대동강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였는데 광개토왕의 정벌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397년 한산漢山의 북책까지 올라가다가 돌아왔는데 이는 대동강을 따라서 한산의 동북쪽에 있는 순천시 은산殷山까지 올라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개로왕이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사성을 수리하고 사성의 북쪽 숭산崇山까지 방죽을 쌓았는데 이 숭산도 순천시 은산의 숭화산崇化山이고 사성은 개천시 고사산산성이다.

즉 당시 고구려 백제의 경계가 남쪽으로 대동강이며 동북쪽으로도 대동강의 가지인 영원군 성룡강成龍江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로왕은 말기에 동북의 말갈국과 함께 고구려를 같이 치기로 협상한 사실이 [위서-물길전]에 나온다.

 

영락8년 398년에 장수를 보내어 숙신의 터전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과 남녀 삼백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八年戊戌 敎遣 偏師 觀 肅愼土谷 因偏抄得 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來朝貢○事.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 동황성에서 하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협보유리왕 때 남한으로 감의 후예인 안라인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399년 백제가 반격해오자 광개토왕은 먼저 신라를 구원하고 대마도를 점령하여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후손인 안라인으로 다스리게 했다.


아직 신라왕이 직접 고구려 도성을 찾아와 태왕을 알현하지 않아 불러들였다. 국강상광개토경평호태왕 앞에 신하로서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昔新羅寐錦未有身來,○○○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新羅寐錦○○僕勾○○○○朝貢

신라 매금은 문맥상으로 신라왕의 호칭이 된다.

<광개토왕 비문> 중에서 백제나 신라에는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고 백잔주百殘主로 폄하하고 신라 매금으로 폄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록이 [한단고기]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기록에도 나온다. 신라의 매금과 백제 어하라와 남평양에서 만나서 조공의 양과 국경 수비군의 수를 정하였다. 又與 新羅 寐錦 百濟 於瑕羅 會于 南平壤 約定 納貢 戌兵之數.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부른 것은 고주몽이 소서노를 책립하여 부른 것이 최초 기록이다. 또한 중국의 [북사] 등에서도 백제는 자기들의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백제 어라하와 상대되는 신라 매금은 신라왕의 호칭인데 신라 자체의 왕호인 마립간의 변형이다.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백제의 반격을 받은 광개토왕은 고구려 평양성에서 이를 분쇄하고 아신왕을 퇴위시켰다.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佳城,○○○○○○, 나○성 등을 다시 깨트렸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영락20년 410년에 동부여가 본래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태왕이 직접 정벌을 나가 여성에 이르렀더니 여성국의 해왕이 항복하므로 태왕은 용서하고 돌아왔다.

또한 고구려를 존경하여 관리를 보내어 항복한 자들이 있었으니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등이다. 이 원정에서 64성과 1400부락을 깨트렸다.

二十年庚戌 東夫餘 舊是 鄒牟王 屬民 中叛 不貢

王躬率 往討軍到餘城 而餘城國駭○○○○○○○○○ 王恩普○於是旋還

又其 慕化 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木耑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태왕의 묘를 지키는 수묘인가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매구여민 국연2가 간연 3가, 동해매 국연3가 간연 5가, 돈성민 간연4가, 간성 간연1가, 비리성 간연2가, 평양성민 국연1가 간연10가, 거련 간연2가, 배루인 국연1가 간연 43가, 양곡 간연2가, 안부련 간연22가, 개곡 간연3가, 신성 간연3가, 남소성 국연 1가,

守墓人烟戶, 賣句余民 國烟二 看烟三, 東海賈 國烟三 看烟五, 敦城民 四家爲看烟, 干城 一家爲看烟, 碑利城 二家爲國烟, 平穰城民 國烟一家 看烟十,  [車]連 二家爲看烟, 俳蔞人國烟一 看烟四十三, 梁谷 二家爲看烟, ○城 二家爲看烟, 安夫連 二十二家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 三家爲看烟, 南蘇城 一家爲國烟.


새로온 수묘인은 다음과 같다. 한예사수성 국연1가 간연1가, 모루성 간연2가, 두비압령한 간연5가, 구모객두 간연2가, 구저한 간연1가, 사조성한예 국연3가 간연21가, 고모야라성 간연1가, 막고성 국연1가 간연3가, 객현한 간연1가, 아단성-잡진성 합쳐서 간연 10가, 파노성한 간연9가, 구모로성 간연4가, 약모로성 간연2가, 모수성 간연3가, 간궁리성 국연2가 간연3가, 미추성 국연1가 간연 7가, 야리성 간연3가, 두노성 국연1가 간연2가, 오리성 국연2가 간연8가, 수추성 국연2가 간연5가, 백제남거한 국연1가 간연5가, 대산 한성 간연6가, 농매성 국연1가 간연7가, 윤노성 국연1가 간연 22가, 고모루성 국연2가 간연 8가, 탕성 국연1가 간연8가, 미성 간연6가, 취자성 간연5가, 삼양성 간연24가, 산나성 국연1가, 나단성 간연1가, 구모성 간연1가, 어리성 간연8가, 비리성 간연3가, 세성 간연3가.  

新來 韓穢沙水城 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嶺韓 五家爲看烟, 句牟客頭 二家爲看烟, 求底韓 一家爲看烟, 舍蔦城韓穢 國烟三 看烟二十一, 古模耶羅城 一家爲看烟, 莫古城 國烟一 看烟三, 客賢韓 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 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 九家爲看烟, 臼模盧城 四家爲看烟, 若模盧城 二家爲看烟, 牟水城 三家爲看烟, 幹弓利城 國烟二 看烟三, 彌鄒城 國烟一 看烟○○○○七, 也利城 三家爲看烟, 豆奴城 國烟一 看烟二, 奧利城 國烟二 看烟八, 須鄒城 國烟二 看烟五, 百殘南居韓 國烟一 看烟五, 大山韓城 六家爲看烟, 農賣城 國烟一 看烟七, 閏奴城 國烟一 看烟二十二, 古牟婁城 國烟二 看烟八, 湯城 國烟一 看烟八, 味城 六家爲看烟, 就咨城 五家爲看烟, 彡穰城 二十四家爲看烟, 散那城 一家爲國烟, 那旦城 一家爲看烟, 勾牟城 一家爲看烟, 於利城 八家爲看烟, 比利城 三家爲看烟, 細城 三家爲看烟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살아계실 제에 말씀하시기를 “선조왕께서 단지 원근의 고구려구민으로서 묘를 지키고 가꾸게 하셨다. 나는 고구려 구민이 고생할까 염려한다. 내가 죽은 후에 수묘인을 정할 때에는 내가 몸소 다닌 각 부락에서 다 오라고 하지 말고, 한예인들로 수묘를 하도록 준비하라.” 

유언이 이와 같으니 오늘 이대로 시행하여서 한예 각 성에 명령을 내려서 220가를 뽑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고구려식 제사법을 모를 것을 염려하여 고구려 구민 110가를 다시 뽑아 배치하니 수묘호는 국연이 30가요, 간연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存時 敎言 祖王先王 但敎 取 遠近舊民 守墓 洒掃 吾慮 舊民 轉當 羸劣, 若 吾 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 吾躬巡所 略來 韓穢 令備 洒掃.

言敎如此 是以如敎 令 取 韓穢 二百二十家 慮 其不知法 卽 復取 舊民 一百十家 合 新舊守墓戶 國烟三十 看烟三百 都合三百三十家


선조왕 이래로 왕릉 위에 석비를 세우지 않아서 수묘인 연호를 설치하여 관리하는데 착오가 있어 왔다.

따라서 국강상광개초경평안호태왕은 선조왕릉에 비석을 세우고 그 수묘인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고 수묘인 제도를 제도화 하였다.

이후로는 수묘인들이 논밭을 서로 팔고사는 것을 금하니 법을 어기고 팔고사는 사람은 형벌에 처한다. 이러한 법에 따라서 왕릉을 지켜라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 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 烟戶 不令 差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扌亶買 其有 違令賣者刑之買人 制令守墓之.


 

10. 장수왕의 평양성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