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7.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의 평양성 시대

추모왕

유리왕

대무신왕

태조대왕

차대왕

산상왕

중천왕

고국원왕

광개토왕

장수왕

평원왕

보장왕

보장왕2

 

 

7-1 중천왕 ad248~ad270

       

동천왕 말에 <동천왕 양위교서>에서 평양성을 짓도록 하였다.

....환도성에 돌아와서 보고 흘계를 (평양으로) 보내어 새로 도성(동천왕 평양東川王平壤)을 짓게 하고 왕위를 양위한다.

 

평양성은 먼저 위치도를 보면 요하가 서남으로 꺾이는데 있다.

<신당서/지리지>에서 고탐의 도리기에 언급된 "압록강 입구로부터 물길 630리 상류 지역이고, 졸본부 황성으로부터 물길로 200리 서남쪽에 있던 구도성(九都城)이다.

현재 철법시(鐵法市) 혹은 조병산시(調兵山市)라고 부르는 곳이다.

요나라 몽주 자몽현 기록과도 관련된다. 본래 한 루방현이라고 했는데 루방현은 한사군 낙랑군의 패수가 나오는 곳이다. 
紫蒙縣。本漢鏤芳縣地。後拂涅國置東平府,領蒙州紫蒙縣。後徙遼城,並入黃嶺縣。渤海後為紫蒙縣。戶一千。
요나라는 이 몽주 위치에 기주祺州를 두었는데 그 기주성은 조병산시 동북 화평 부근에서 탑이 발굴되었다.

따라서 조병산시 위치가 한무제거 처음 설치한 낙랑군 패수현 위치인 것이다.

 

이 조병산시가 동천왕과 장수왕의 구도 평양성 위치다.

위 지도를 위성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현지의 상세 지도를 보면 법고시에서 조병산시로 향하는 철로가 빙 돌아간 양초구(洋草溝), 사산구(蛇山溝)의 토축 성벽부터 평양도가 시작되는데 이는 평양의 북성이다. 사산이라는 이름으로 보아서 가장 나중에 지어진 것이다. 사산성은 양초성을 포함여서 동서길이가 8km다.

이 지역의 산 이름이 명나라 때 책인 <요동지>에서 도산(刀山)과 필산(畢山)이었는데 도산(都山)이 원말이고 필산은 도성의 끝 산이라는 의미다. 지금은 이를 합쳐서 조병산(調兵山)이라고 한다. <요동지>에서 도필산은 요하 서안에 있었다. 즉 지금의 물길은 바뀐 것이고, 고대에는 조병산시 바로 동쪽에 강물이 흘렀으며 그 흔적이 위성사진으로 보인다. 사산성은 양초성을 포함여서 동서 길이가 8km다.


사산성 위치를 북쪽에서 본 모습. 철로가 사산성을 돌아가고 있다.
조병산시 남쪽 철법시 서편에 쇄룡구(鎖龍溝)와 고려구(高麗구), 성자(城子)가 보이는데 쇄룡구가 바로 고국원왕이 증축한 평양성이며, 전연의 모용황과 목저성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망한 단웅곡이 된다. 또한 백제의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전사한 곳이다. 서북면 장벽이 위성사진으로 뚜렷하다. .
철법시 서쪽의 쇄성, 즉 고국원왕이 지은 환도성이다. 쇄성은 동벽의 길이가 6.5km다.


쇄성의 서북벽이 뚜렷하다.
그 아래 성자산(城子山)이 있는데 340m로서 이 지역에서 가장 높다. 성자산 동북방에 위치한 남성이 동천왕이 지은 평양성이다. 남성은 동벽의 길이가 6km다.


성자산 서북에 단가향이 있는데 이는 3세 단군 가륵의 평양성이다. 그 서남의 토성은 낙랑군 패수현성이 된다. 패수현성은 원형이며 종축이 1.5Km다. 서남에는 평양도의 남단을 지키는 위성이 보인다.


서북으로는 능원이 보이는데 이 중에는 몇 분의 단군릉을 비롯하여 모용황에게 도굴당한 미천왕릉도 있을 것이다. 낙랑군 조선성은 서남쪽에 있다. 6세 단군 위나 때에 만들었고 소밀성이라고 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가 들어와서 한무제와 맞서 싸우다가 암살당해서 한사군이 설치된 낙랑군 조선성이 되었다. 조선성은 종축이 3.3km다.

처음으로 평양에 살게된 것은 중천왕이다.

중천왕(中川王)은 이름이 연불(然弗)이고 동천왕의 아들이다. 자태와 용모가 뛰어나고 지략이 있었다.
동천왕이 17년에 왕태자로 삼았고, 22년 가을 9월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겨울 10월에 연씨(椽氏)를 왕후로 삼았다. 11월에 왕의 동생 예물(預物)과 사구(奢句)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3년(250) 봄 2월에 왕은 국상(國相) 명림어수(明臨於漱)에게 명령하여 서울과 지방의 군대의 일을 겸해서 맡아보게 하였다.

4년(251) 여름 4월에 왕은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져버렸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곱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어, 왕이 총애하여 장차 소후(小后)로 삼으려고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녀가 사랑을 독차지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서위(西魏)에서 긴 머리카락을 구하여 천금을 주고 사려고 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선왕께서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서 침입을 받고 달아나 사직을 거의 잃을 뻔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일개 심부름꾼을 보내 장발미인을 바치면, 그들이 반드시 흔쾌히 받고 다시 침략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 뜻을 알고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왕후가 자기에게 해를 가할 것을 염려하여 거꾸로 왕에게 왕후를 참소하였다. “왕후가 항상 저를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농사짓는 집 여자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생각컨대, 왕후가 대왕께서 나간 틈을 엿보아 제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훗날 왕이 기구(箕丘)로 사냥나갔다가 돌아오니, 부인이 가죽주머니를 들고 왕을 맞이하여 울면서 말하였다. “왕후가 저를 이 속에 담아 바다에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저의 작은 목숨을 살려주시어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어찌 감히 다시 곁에서 모실 것을 바라겠습니까?” 왕은 주위에 물어보고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노하여 관나부인에게 “네가 꼭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겠느냐?”고 말하고는 사람을 시켜 던져버렸다.

연나부椽那部가 관나부貫那部에 승리한 것이다.
연나부는 훗날의 신성(신성; 내몽고 나만기진 신진) 부근인데, 이때도  고구려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년(254) 여름 4월에 국상 명림어수가 죽자, 비류(沸流) 패자(沛者) 음우(陰友)를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8년(255)에 왕자 약로(藥盧)를 왕태자로 세우고, 나라 안에 사면하였다.
9년(256) 겨울 11월에 연나(椽那) 명림홀도(明臨笏覩)를 공주에게 장가들여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 12월에 눈이 내리지 않고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2년(259) 겨울 12월에 왕은 두눌(杜訥) 골짜기로 사냥나갔다.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정예의 기병(精騎) 5천 명을 뽑아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13년(260) 가을 9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15년(262) 가을 7월에 왕은 기구(箕丘)로 사냥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23년(270)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중천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중천왕이라고 하였다.

 

7-2 서천왕 ad270~ad292

서천왕(西川王)은 이름이 약로(藥盧)<또는 약우(若友)라고도 하였다.>이고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어질어 나라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중천왕 8년에 태자로 삼았고, 23년 겨울 10월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2년(271) 봄 정월에 서부(西部) 대사자 우수(于漱)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국상 음우(陰友)가 죽었다. 9월에 상루(尙婁)를 국상으로 삼았다. 상루는 음우의 아들이다. 겨울 1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3년(272)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6월에 크게 가물었다.
4년(273) 가을 7월 초하루 정유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나사 추산은 남반구에서 10월 28일에 있었다. 0273 Oct 28 07:24 A 86 -0.333 0.920 30.9S 55.9E 70 321 08m50s
273년 당시 일식 기록을 보면 음력 4월1일이 양력 5월 4일이었다. 음력 7월 1일이 윤달이 끼어도 120일밖에 되지 않으니 양력 9월1일을 넘을 수 없는데, 음력 7월1일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일식이 없었다. 또한 양력 10월 28일의 지구 남반구 일식에 대응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는 나사 추산에 의하면 273년 봄 5월 4일에 있었던 일식으로 고려된다. 즉 고구려 본래 기록이 3월인데 김부식이 잘못 대응시킨 것으로 본다.
중국 기록은 4월 초하루로 되어 있는데 고구려는 3월일 수도 있다.

7년(276) 여름 4월에 왕은 신성(新城)<신성은 나라 동북쪽의 큰 진大鎭이라고도 하였다.>으로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에 왕은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9월에 신비로운 새(神雀)가 궁정에 모여들었다.
봉상왕 2년에 모용외의 서쪽 침입에 북부의 신성으로 피난하기 위해 곡림鵠林을 지난다. 창도현의 곡가점(曲家店)이 당시 곡림이고 그 동북쪽 길림성 이수현梨樹縣 편검성遍劍城으로 고려된다. 발해 압록부 신주神州의 신화현神化縣으로 고려되며 훗날 청나라 때에 봉화현(奉化縣)이 되었다.   

11년(280) 겨울 10월에 숙신이 쳐들어 와서 변경의 백성들을 살륙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보잘 것 없는 몸으로 나라를 잘못 이어 받아, 나의 덕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이 멀리 떨치지 못하여, 이렇게 이웃의 적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게 하였다. 꾀많은 신하와 용맹한 장수를 얻어 적을 멀리 쳐서 깨뜨리려고 하니, 그대들은 기이한 꾀와 특이한 책략이 있어서 그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한 자를 각각 천거하여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임금님의 동생 달가(達賈)는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서 대장이 될 만합니다.”고 말하였다. 왕은 이리하여 달가를 보내 적을 치게 하였다. 달가는 기이한 꾀를 내어 엄습해서 단로성(檀盧城)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00여 가(家)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부락 예닐곱 곳을 항복시켜 복속시켰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대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아울러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강희제 때의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의하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요나라를 치기 위해서 영강주寧江州에서 파자간산婆刺赶山을 지나 달로고성達魯古城을 지나 요나라 황룡부黃龍府, 즉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에 이른다.
현재
길림성 부여시 서북 토성자(吉林省扶餘西北土城子)라고 한다. 장춘시가 숙신의 후예였으므로 그 북쪽의 부여시 달로성이 타당하며 고구려 때 단로성으로 고려된다.
고구려 때 숙신성은 발해 속주로 추정되는 덕혜현德惠縣 조양향朝陽鄕 쌍성자雙城子 고성(성둘레 4000m)이거나 대파고성(성둘레 3150m)이다.  

17년(286) 봄 2월에 왕의 아우 일우(逸友)와 소발(素勃) 등 두 사람이 반역을 꾀하여,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온탕으로 가서 자기 무리들과 무절제하게 놀며 패역한 말을 하였다. 왕은 재상을 시켜준다고 거짓으로 이들을 불러, 그들이 오자 힘센 장사를 시켜 잡아 죽였다.

19년(288) 여름 4월에 왕은 신성으로 행차하였다. 해곡(海谷) 태수가 고래를 바쳤는데 고래의 눈이 밤에 빛이 났다. 가을 8월에 왕은 동쪽으로 사냥나가서 흰 사슴을 잡았다.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 11월에 왕은 신성(新城)으로부터 돌아왔다.

23년(292) 왕이 죽었다. 서천(西川)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서천왕이라고 하였다.

 

7-3 봉상왕 ad292~ad301

봉상왕(烽上王)의 이름은 상부(相夫)<혹은 삽시루([]矢婁)라고도 썼다.>이고 서천왕의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서천왕이 재위 23년에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원년(292) 봄 3월에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 형제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어서 백성들이 우러러 보게 되자, 그를 의심하여 음모로써 죽였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였다.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 숙신의 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가 죽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 눈물을 뿌리고 서로 문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년(293)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하여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는 왕이 도망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재(新城宰)인 북부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갔다. 왕은 기뻐하고 고노자에게 작위를 더하여 대형(大兄)으로 삼고, 겸하여 곡림을 식읍으로 주었다. 9월에 왕은 그 아우 돌고([]固)가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돌고에게 죄가 없었으므로 애통해 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들판으로 달아났다.

3년(294) 가을 9월에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의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하여 와서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는데, 인부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생기고, 또 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모용씨가 군대가 날래고 강하여 우리 영토를 거듭 침범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또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습니다.” 왕은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다. 그는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

당시 선비족은 북방족이므로 북방 지리를 잘 알기에, 교래하를 이용하여 환도성이나 평양성을 우회하는 북쪽 경로로 고국원의 졸본성에 접근하였다고 고려된다. 남쪽 경로는 요동에서 구려를 지나 환도성으로 들어오는 길인데 성이 많고 북쪽 경로는 사막을 우회하므로 방어성이 적다.

7년(298) 가을 9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0월에 왕은 궁실을 증축하였는데 극히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여,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곤핍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자주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에 왕은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8년(299) 가을 9월에 귀신이 봉산(烽山)에서 울었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9년(300)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8월에 왕은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인 자들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백성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고 일에 지쳐서 그 때문에 도망쳐 흩어졌다. 창조리가 간하였다. “재난이 거듭 닥쳐 곡식이 자라지 않아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어 버려, 장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인과 어린 아이가 구덩이에서 뒹구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염려하며, 삼가 두려워하고 수양하며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들을 몰아 토목 일로 고달프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부모된 뜻에 매우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쳐들어 온다면 사직과 백성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

왕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다.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찬을 가로채려고 하는구나.” 창조리가 말하였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성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국상의 자리를 잠시 채우고 있으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백성들의 칭찬을 가로채겠습니까?” 왕은 웃으며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겠느냐? 다시는 말하지 않기 바란다.”고 하였다. 창조리는 왕이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해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물러나와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모의하여 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며, 두 아들도 따라서 죽었다. 봉산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왕이라고 하였다.

 

7-4 미천왕 ad301~ad331

미천왕(美川王)<또는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을불(乙弗)<혹은 우불(憂弗)이라고도 썼다.>이고 서천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의 아들이다. 이전에 봉상왕이 아우 돌고가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이니, 아들 을불은 살해당할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처음에는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의 집에 가서 고용살이를 하였는데, 음모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켰다. 그집 곁의 늪에서 개구리가 울면, 을불을 시켜 밤에 기와조각과 돌을 던져 그 소리를 못내게 하고, 낮에는 나무하기를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을불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나,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 놓고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서 기숙하였다. 그 집의 할멈이 소금을 청하므로 한 말쯤 주고, 다시 청하는 것을 주지 않았더니, 그 할멈은 원망하고 노하여 소금 속에 몰래 신을 넣어 두었다. 을불은 알지 못하고 짐을 지고 길을 떠났는데, 할멈이 쫓아와 신을 찾아내어서 을불이 신을 숨겼다고 꾸며 압록재(鴨[]宰)에게 고소하였다. 압록재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할멈에게 주고 볼기를 때리고 놓아 주었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야위고 옷이 남루하여 사람들이 보고도 그가 왕손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고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가에 이르렀을 때 한 장부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용모는 비록 초췌하였으나 몸가짐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였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할 것을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여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고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을불은 의심하여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찾아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소우 등이 말하였다. “지금의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여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매우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마침내 을불을 받들어 모시고 돌아왔다. 창조리가 기뻐하며 조맥(鳥陌) 남쪽 집에 모셔두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은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나갔는데, 국상 창조리가 따라가며 여러 사람들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하고, 갈대잎을 관에 꽂으니 여러 사람들도 모두 꽂았다. 창조리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은 것을 알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어 군사로 주위를 지키게 하고, 이윽고 왕손을 맞이하여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누런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혔다. 11월에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와서 6일 동안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12월에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

3년(302) 가을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311)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遣將襲取遼東西安平
요동이 고구려 땅이 된 것이다. 공손강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은 것이다. 서안평은 의무려산 동쪽으로 고려되며 소요수 북쪽에 소수맥구려의 여달성이 있다.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 무렵은 [자치통감]에서 장통張統이 낙랑, 대방을 거느렸는데, 모용외에게 망명하여 전연의 장수가 되었다. 
따라서 이 낙랑, 대방은 위나라가 237년 요동국을 우회하여 바다 건너에 세웠다가 한예에 망한 낙랑, 대방이다. 당시로서는 백제에 귀속했던 낙랑, 대방이다.  

[자치통감]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 餘家歸廆,廆為之置樂浪郡,以統為太守,遵參軍事. 
이 장통의 세력이 백제 세력인 것은 전연황제 모용황이 용성으로 천도하고 나서 고구려 환도성을 치고, 궁궐을 지으면서 모용황이 도성에 있는 백제 세력의 반란을 걱정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백제 세력은 바로 장통의 세력이라고 할 것이다.
<진서晉書/모용황전>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이 장통의 세력은 백제 분서왕을 암살하고, 백제 낙랑을 점거하여 스스로 낙랑태수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7년(304)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후일에 백제 개로대왕의 대방태수가 장씨張氏이므로 장통과 같은 갈래인 것으로 보인다.

15년(314)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16년(315) 봄 2월에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에 살별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나라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 나라와 단씨(段氏)·우문씨(宇文氏)를 달래어 함께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牛酒)을 보내 위로하였다.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음모한다고 의심하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홀로 성을 빼앗겠다.”고 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모용황과 장사(長史) 배의(裵[])를 시켜 정예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최비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형의 아들 도(燾)를 시켜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니, 최도가 두려워 머리를 조아려 사실을 고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고 최비에게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말하고,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갔다. 최비가 수십 기마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우리 나라로 도망쳐 오고, 그 무리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인(仁)으로 하여금 요동을 진무(鎭撫)하게 하니 관부와 저잣거리가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는 하성(河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를 사로잡아서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자주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왕이 맹약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21년(320) 겨울 12월에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31년(330)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호시(蒿矢)를 전하였다.

32년(331)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미천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미천왕이라고 하였다.


8. 고국원왕, 소수림왕의 황성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