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

환웅 배달국 홍산문화 bc3898~bc2333

1. 환웅시대 개설      2. 신시 아사달의 고증    3. 홍산 유적지      4. 홍산문화의 특징

환웅은 기마 목축 민족으로서 태양을 숭상하고 각종 새를 숭상하며, 또한 구려문화의 전통가치인 용과 거북 등을 숭상했다.

태양에 사는 새인 삼족오三足烏(태양 흑점의 형상)와 부엉이나 매 등 여러 새를 숭상했는데 새를 영혼의 전령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제 용으로 대표되는 토착적 물의 문화와, 새로 유입되었던 태양의 문화, 불의 문화가 융화되어지는 것이 환웅시대다.

          

    1. 환웅시대 개설

고고학계에서는 홍산문화를 대략 bc3500년부터라고 알려져왔는데, 우리나라 고기록에 의하여 단군시대와 환웅시대를 더하면 bc3898년이 된다.
안함로의 <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웅씨는 천신의 부름을 받들어 백산, 흑수지간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여정을 뚫고 청구 땅에 궁지를 구획하였다...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고 신시에 도읍하였다. 桓雄氏 繼興 奉天神之詔 降于 白山 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劃井地 於靑邱. .......立都神市 國號倍達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는 <삼성기>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배달은 환웅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다. 뒤에 청구국으로 수도를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倍達 桓雄定有天下之號也 其所都曰神市 後徙靑邱國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1세 환웅은 거발한居發桓,
  2세 환웅은 거불리居佛理,  3세 환웅은 우야고右耶古,  4세 환웅은 모사라慕士羅,  5세 환웅은 태우의太虞儀 6세 환웅은 다의발多儀發 , 7세 환웅은 거련居連,  8세 환웅은 안부련安夫連,  9세 환웅은 양운養雲, 10세 환웅은 갈고曷古 또는 독로한獨盧韓, 11세 환웅은 거야발居耶發, 12세 환웅은 주무신州武愼, 13세 환웅은 사와라斯瓦羅, 14세 환웅은 자오지慈烏支 또는 치우蚩尤, 청구국으로 옮겼다. 徒都靑邱國, 15세 환웅은 치액특蚩額特, 16세 환웅은 축다세祝多世, 17세 환웅은 혁다세赫多世, 18세 환웅은 거불단居弗檀 등이다.

안함로의 <삼성기>와 <신시역대기>로 보면 1세 환웅은 먼저 백산과 흑수 사이의 청구에 내려와 천평에 도읍하고, 환인국을 점령하여 신시에서 개천하고, 그후 다시 청구로 되돌아와 18세를 전하였다. 15세 치우환웅에 이르러서는 청구국이라는 이름으로 산동반도 용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따라서 환웅 18분 중에 4분은 중국에 있게 된다.

환웅이 3000인을 거느리고 서요하로 들어와서는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이 홍산문화권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난하灤河와 서요하西遼河의 북쪽 가지가 발원하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서 높이는 2067m다.

서쪽으로 나가는 난하 이외에도 대광정자산에서 북쪽으로 서요하의 가지인 백분하百汾河가 발원하여 케스케덴克什克腾旗을 지나고, 대광정자산에서 동쪽으로는 등롱하燈籠河가 발원하여 옹고트翁牛特旗를 지나고, 동남쪽으로는 음하陰河가 발원하여 적봉시 홍산紅山을 지나는데, 난하를 뺀 나머지 모두는 다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모여서 옹고트를 남과 북으로 각각 지나면 서요하로 합친다.

[요사지리지고遼史地理志考]에 의하면 옛 요락수饒樂水인 지금의 영금하英金河가 하북성 위장(圍場 =하북성 위장현)의 도태산都呼岱山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도태산이 곧 대광정자산이고 환웅의 태백산이다. 도태산徒太山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불함산不咸山이라고도 하였다.

<삼한관경본기三韓觀境本紀>에서 태백산太白山은 비서갑斐西岬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또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인데 천왕이 순수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후 웅녀군熊女君이 세습하였다고 하였다. 대일왕大日王은 웅녀군과 대비되는데 대일왕을 지명으로 찾아보면 오늘날의 대일한산(大日罕-山, 達爾汗山)을 의미한다. 케스케덴 서부 지역 달라이누얼, 즉 달일호수達爾湖水변의 화산火山이다. dalihu라고도 한다.

태백산 비서갑은 대일왕의 대일한산이고, 달리호수에 의해서 비서갑의 하백여신河伯女神이 있었다.

백두산은 bc 180년 전후에 폭발하여 오늘 같은 칼데라 호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백두산 칼데라 호수는 서기 1000년 전후에 만들어졌고 발해 멸망 원인과도 관련없다. 환인, 환웅, 단군 시대 백두산은 역사의 변방이다. 2세기에 기록된 [산해경山海經]에서 대황북경大荒北經 중에 숙신국肅慎氏之國에는 불함산不咸山이 있다고 하였다. 숙신씨는 천산에서 bc2300년경에 장춘으로 이동하였고 그때 불함산이라는 이름도 같이 옮긴 것이다.

 

환웅의 첫 수도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데, 백산은 대광정자산이었고 흑수는 지금의 노합하老哈河로서 마우산馬盂山(=1729m)에서 발원한다. 마우산은 옛 우이산隅夷山이면서 고대에는 흑산黑山이어서 흑수黑水라고 하였을 것이다. 흑수는 뒤에 도하都河와 토하土河를 거쳐 노로하老魯河라고 불리게 되는데 노로하는 나라하, 즉 낙랑하에서 비롯된 말이다. 환웅의 배달국은 백산의 물과 흑산의 물이 만나는 적봉시 동북에 있었던 것이다.

적봉시 홍산紅山의 동북쪽 동팔가석성東八家石城은 신석기시대에 출현한 석성石城으로서 남북이 160m, 동서가 140m인데 불규칙한 장방형 모양이다.

적봉시 녕성현에서는 팔가八家를 몽고말로 보리가“布日嘎”라고 이중으로 표기했다. 즉 팔가는 팔씨네 집이 아니고 보리가의 음독을 비교하여서 “발가”라는 우리말의 차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석성의 석石까지 당겨서 읽으면 발가달성이 된다. 즉 밝달성, 배달성이다.

주위에는 신정新井, 상정上井, 삼안정三眼井, 동삼안정東三眼井, 동신정東新井 이도정二道井 삼도정三道井 사도정四道井 등 정井자 지명이 매우 많으니, 환웅은 이곳에 정착하기 위하여 우물을 중심으로 정착촌을 만들어 자정子井, 여정女井 등을 획정劃井하고 3000인을 살게 한 것이다.
물이 성읍 건설의 중심이 되는 것은 확실하게 농업 위주 문명 시대인 것을 의미한다.

동팔가석성을 지나는 물이름은 대광정자산의 음하陰河에서 비롯되는 영금하英金河다. 음하나 영금하는 둘 다 우리말 임금과 관련되는 임금하의 차자다. 음하를 중국 발음대로 “인하”로 읽으면 인금하의 인하가 되는 것이다. 음하 상류 삼좌점三座店 부근에 청동기 시대 석성이 20여좌, 왕가점王家店 부근에 5좌, 초두랑진初頭郞鎭 부근에 12개좌 석성이 있다. 그중에 지가영자池家營子 석성이 최대의 원형석성으로서 면적이 약 10만㎡다.(지름 350m?)

 

영금하를 후대에는 요락수饒樂水라고도 하고 또 낙수樂水라고도 했다.

적봉시 북쪽 영금하 변에는 “지주산蜘蛛山”이라는 홍산문화 유적지도 있다. 지주산은 우리말로 거미산이고 이는 고미산, 곰의산, 즉 곰산이 어원이다. 부여어 계통인 일본말로는 신神이 “가미”라서 고미산을 신산神山으로 볼 수 있다. 곰산의 또다른 차자는 금산金山이다. 백제 웅진성의 곰강이 금강錦江으로 쓰인 것이다. 영금산은 즉 잉곰산이었다. 영금하의 또다른 상류 가지는 고도하古都河라고 한다. 즉 영금하, 임금하와 마찬가지로 도하都河 역시 영금하가 고대 도읍지의 물인 것을 의미한다. 도하都河가 후에 토하土河로 바뀌었다.

고도하古都河 부근 서도촌西道村 강변에 고구려 성의 특징인 점장대点將臺 유적이 외롭게 남아있다. 그 서쪽에는 판축토성版築土城인 송주성松州城(1000m x 500m)이 남아있다. 당나라가 거란에 설치했던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이 도하都河는 송강松江, 또는 송산하松山河라고도 불렀다.

적봉 남쪽에 팔리포八里浦가 있는데, 적봉이나 홍산은 우리말로 “붉은달”이며 “밝달”이고, 팔리포는 “밝성”의 “밝”포로 고려된다. 적봉 동쪽의 우미려하 동고성에도 고구려 성의 흔적인 점장대가 남아 있다.

서요하의 남쪽 발원지인 흑리하黑里河(=노하老河의 최상류)가 흐르는 영성현寧城縣 팔리한진八里罕鎭의 팔리한하八里罕河를 보면 “팔리한”은 발한發桓의 차음借音이다. 간혹 파이한巴爾罕으로도 기록하니 역시 발한의 차음이다. (팔리의 리里를 앞글자의 받침으로 보는 것은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 기록에서 몽골을 몽고리蒙古里로 기록한 것이나 똑같은 경우다. 비서갑 달리한성의 리도 마찬가지다.)

1세 환웅의 이름이 거발한居發桓인데,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고국천에 묻힌 것처럼 거발한 환웅은 발한하發桓河, 즉 팔리한하에 묻혔을 것이다. 즉 발한성에 묻힌 것인데 이는 영성현의 남산근 유적지와 관련된다.

환웅시대 첫 도읍 청구국 천평성인 동팔가달성과 거발한 환웅이 묻힌 팔리한진 발한성의 거리는 120km내외다.

종합하면 환웅 세력은 천산의 신시로부터 태백산의 청구 땅 배달국으로 내려온 세력이며 예족을 구축하고 웅족으로 대신하였다. 마늘과 쑥으로 은유되는 대기근이 웅족의 남진을 초래하였을 것인데, 배서갑은 해발 1000m의 고지고, 적봉은 해발 500m 정도다.

 

2. 신시 아사달의 고증

배달국 신시 아사달은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워 천제와 즉위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신인 왕검王儉이 800명과 함께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지허檀木之墟로 와서 국인들의 추대로 천제가 되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수도는 백주白州 무엽산無葉山이라고 했다.

극시극등기克什克腾旗(=케스케덴)의 아시하도阿斯哈图(=2029m)는 흥안령산맥의 남쪽 최고 봉우리로서 과거에 목엽산木葉山이라 불렀다. 

또한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 동남쪽 천산진의 천산天山(=685m, )도 요나라때 목엽산이었다.

물론 단군 왕검의 수도였던 요녕성 창무彰武시 위가자 아래에도 무엽산葉茂臺의 흔적인 엽무대가 있다.

[단기고사]에서 3세 단군 가륵嘉勒이 동생 가록嘉祿을 신시 아사달에 책봉하고, 사달왕斯達王이라고 불렀다. 이후 진번후眞番候라고도 하였다.

왕검의 손자 가록왕으로 비롯되는 “가록산嘉鹿山”이 요나라 때 왕족 야율습열耶律習涅 묘지墓志가 발견되어 그 위치가 고증되었다.

가록산은 지금의 소한산小罕山(=1497m)인데, 파림좌기巴林左旗와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사이에 있다. 지도에 표시된 천산의 동북에 있고 지도에 표시된 신시의 서북쪽에 있다.

따라서 가록산의 아래인 아로과이심기의 천산진天山鎭(=지도에서 신시)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치러 가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목엽산木葉山이며, 이 천산진 아래는 백성자白城子가 있으니 신시라고 부르던 백악산아사달의 흔적이고 또 사달왕과 관계될 수 있는 시달목소목柴達木-蘇木도 있다. 만주말 시달목을 한어로 번역하면 백락白濼이라 한다. 백락은 흰 물이며 동시에 밝다는 뜻의 대웅大熊으로 보면 환웅산이 된다.

대웅大熊을 몽고어로 파라이巴賴라고 한다. 우리말로 빛을 낸다는 의미의 “밝”이다. 백락도 대웅도 곧 우리말 밝을 의미한다. 현재 지명의 파림기도 대웅에서 유래된 것이다.


환웅의 신시 아사달 위치와 성터, 백악산아사달이라고도 한다. 옆에는 해모수 북부여성터가 있다

 

백성자를 요나라는 영주永州라고 했는데, 여기에 의미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상경도 영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영주 목엽산에는 거란시조 기수가한묘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인이 백마를 타고 마우산(지도의 흑산)에서 토하를 따라 내려오고 천녀가 푸른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평지송림에서 황하潢河를 따라 내려와서 목엽산에 이르러 토하와 황하 두 강이 만나니 서로 결합하여 8명의 아들을 낳아서 8부를 두었다. 有木葉山,上建契丹始祖廟,奇首可汗在南廟,可敦在北廟 繪塑二聖並八子神像。相傳有神人乘白馬,自馬盂山浮土河而東,有天女駕青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至木葉山,二水合流,相遇爲配偶,生八子。其後族屬漸盛,分爲八部

마우산馬盂山은 요나라 야율종耶律琮과 진진대장공주秦晉大長公主 묘지 발굴로 인하여 확증되었는데 팔리한 고성 서남쪽의 서요하 발원지인 마우산으로서 높이는 1729m이다. 즉 신인神人은 신시를 세운 환웅인데, 토하를 따라 말을 타고 가서 천녀, 즉 웅녀를 만나서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황수는 거란 상경임황부의 물로서 상경 동쪽을 흐르는 물이다. 이는 소한산, 즉 가록산의 동쪽에서 비롯되며 지금은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淪河라고 한다. 평지송림은 상경의 동쪽 40리 지점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곳으로 호교胡嶠의 [함요기陷遼記, 946~953년]에 기록되었다.  

거란 8부족을 만든 거란 시조로 추앙되는 기수가한奇首可汗이 언제 때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가돈, 즉 천녀의 묘가 기수가한의 묘보다 북쪽인 것으로 보아서 우하량 유적지처럼 여제사장이 있던 모계사회 시대 전설로 고려된다.

 

가한이라는 말의 최고 기록은 <번한세가>의 2대 번한 낭사가 세운 가한성可汗城이다. 여기서 가한은 단군 아래로 보이지만 처음부터 아래는 아니다.

거란족은 북부여의 패망 이후 천년 이상 역사를 잃어버렸고, 신인 환웅의 사당을 다시 발견해서는 그들이 아는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신인을 기수라 하고 환웅을 가한이라고 호칭했을 수 있다. 고구려가 5부, 부여가 6가제였는데 단군시대는 [규원사화] 기록에서 호가, 마가, 우가, 웅가, 응가, 노가, 학가, 구가 등 8가제다. <신시본기>에서 8괘를 만들어 복희역을 만든 복희가 태어난 곳이 신시라고 하는데 이 천산진 북쪽 부하문화 유적지에서는 가장 오래된 복골이 나왔다. 그 복골이야말로 복희역의 출발점인 것이다.

 

요나라 때 이 목엽산에서 요나라 황제와 황후가 직접 절하고 천제天際를 지냈다. [요사-예지]에, 이 천산의 목엽산 한가운데에 왕이 되는 군왕수를 동쪽으로 향해서 중앙에 심고 그 아래에는 신하 나무를 조례 하듯이 세우고

군왕수 뒤에는 배우목으로 두 나무를 심고 이를 신문神門이라고 불렀다.

신문神門은 신목神木, 즉 신단수神檀樹다.

祭山儀:設天神、地祗位於木葉山,東鄉;中立君樹,前植群樹,以像朝班;又偶植二樹,以爲神門。

황제 황후가 이르러서 백마, 흑소, 백양을 잡는데 복신이 기를 흔들고 북을 울리며 희생을 잡고 신단수에 매어단다. 

皇帝、皇后至,夷離畢具禮儀。牲用赭白馬、玄牛、赤白羊,皆牡。僕臣曰旗鼓拽刺,殺牲,體割,懸之君樹。

무당이 술을 붓고...황제, 황후가 와서 군왕목 앞에서 하마하고 남단에 올라 어탑좌에 앉는다. 이하 생략

太巫以酒酹牲。禮官曰敵烈麻都,奏「儀辦」。皇帝服金文金冠,白綾袍,絳帶,懸魚,三山絳垂,飾犀玉刀錯,絡縫烏靴。皇后御絳溗,絡縫紅袍,懸玉珮,雙結帕,絡縫烏靴。皇帝、皇后御鞍馬。群臣在南,命婦在北,服從各部旗幟之色以從。皇帝、皇后至君樹前下馬,升南壇御塌坐。下略


이제 1) 단군 가륵의 동생 사달왕 가록의 가록산의 고증과 가록왕의 신시 아사달, 2) [삼국유사]의 단군 수도 백주 목엽산,

3) 옛 백성자에 남아있는 환웅과 웅녀의 만남 전설 등과 더불어, 4)목엽산에서 행해졌던 신단수 제사법의 유일한 기록에 의해서 1세 거발한 환웅과 단군 왕검의 개천 도읍 신시는 아로과이심기 천산진 남쪽 백성자로 확정된다.

 

거발한 환웅은 태백산에 내려왔다가 신시 목엽산에서 웅씨족과 결합하고 그곳에 수도 아사달을 두고 시장을 열어서 문물을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환웅의 도성은 다시 남쪽 청구, 그의 처음 개척지로 옮겨갔다.

그 웅녀족의 피를 직통으로 받은 단군족에게는 환웅이 강림했던 성산이지만 환웅에게는 그가 사냥하고 순수했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도자기는 갈도褐陶로서 홍산문화의 전형인 채도彩陶가 아니다. 즉 환웅이 강림하여서 웅녀와 결합까지 하였으나 정착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웅녀조차도 환웅을 따라서 남천하여 능원현凌源縣의 우하량牛河梁에 자리잡고 그곳에 살던 기존의 예穢족을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3세 단군 가륵은 신지神誌 고글高契에게 신시 배달의 역사를 기록한 배달유기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신지 고글契의 후손은 바로 글안契丹, 즉 거란족이다. 배달국 신시가 거란족 요나라의 발생지인 것은 이런 연유다. 신시의 신단수 제례 풍습을 시행하고 또 기록하여 남겨두기도 했다. 마한 풍속에서도 대목大木에 방울을 걸어서 신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大熊을 몽고말로 파라巴賴라고 하며 우리말로 “밝”이다. 웅熊의 훈에 “불꽃처럼 빛나는 모양”이 있다. 대웅이 한웅桓熊(⇀桓雄)이고 훈이 밝인데 신시였던 천산의 백성자를 의미한다. 그 동남쪽 시달목소목의 시달목柴達木은 몽고어로서 본래는 박락白濼(蒙名 柴達木)이라 하는데 파라巴賴와 같다.

환웅 전설속의 신단목神檀木이 시달목柴達木으로 기록된 것으로 고려되는데 시달은 마고 전설의 실달實達성과도 관련될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단군 조선의 수도 백주 무엽산은 바로 여기 천산진이다.

 

한편 단군 이후 거란족의 역사 기록이 천년이나 끊겨서, 거란족이 다시 거란국 역사를 편찬할 때는 조상의 신성한 만남이 이름도 잘 모르는 전설이 되어, 환웅-웅녀의 기록이 빠져버렸다. 그 대신에 중국 역사를 빌려다가 [요사-영위지] 앞머리를 만드니 거란 스스로 제 조상인 치우천황을 작란作亂한 인물로 욕했다.

3. 홍산 유적지

1) 나리사대 유적지

가록산(소한산)의 서쪽 한산罕山(=1936m) 또는 새한산賽罕山은 흑산이라고도 했는데, 소한산의 서쪽 골은 흑수黑水라고 했으며 이 흑수가 서요하로 들어가는 길목에 나리사대那日斯臺 유적지가 있다. 나리사대문화 유적지에서는 옥도끼와 더불어서 마노瑪瑙로 만든 석도石刀도 등장한다. 옥기 조각이 매우 다양화 되며 각종의 옥패식이 등장한다. 구름형옥대, 옥구, 물고기형 옥패식, 용형 옥결, 부엉이형 옥패식, 옥관 등이다. (그림 15 참조)

도기는 빗살무늬 토기가 여러 첨가 기법으로 다양해지면서 뱀무늬의 채도문도 등장한다.

나리사대 문화의 가장 주요한 발굴로서 남자와 여자의 돌조각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남자는 35cm 높이에 미간까지 보호하는 투구(투구 재료가 청동인지 코뿔소 가죽인지 알 수 없다.)를 쓰고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여자는 높이 19cm에 안면을 머리칼로 팔자 형태로 가리고 머리 위에는 3층의 족두리 장식을 얹었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무릎을 꿇었다. 여자상과 함께 발굴된 석수상石獸像은 높이 9cm, 남은 길이 14cm의 작은 곰의 형상이다. (아래 그림)

환웅, 웅녀의 만남은 이미 반만년전에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이 이 나리사대 돌조각품으로 증거된다. 이 석조물들처럼 곰 부족의 여자가 소원하여 환웅의 씨를 얻어서 득세를 하고 호랑이족 예穢의 영역을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그 서쪽의 임서현林西縣 쌍정雙井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지에서는 35cm 높이의 임신한 여신상生育女神像이 나왔다. 고구려까지 모시던 부여신扶餘神일 수도 있다.

       

나리사대에서 발굴된 환웅-웅녀, 곰 조각상

나리사대에서 발굴된 옥기

 

웅녀족이 환웅과 함께 예맥의 땅을 빼앗아 옮겨간 곳으로 신석기 홍산문화의 정수격인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최상단의 여신묘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6개 지점에 걸쳐서 약 20개의 대형 적석총과 제단 등이 있다. (그림 16 참조)

남쪽에 금자탑金字塔이라는 제사 건축지는 3단 원형 제단으로서 아랫단의 직경이 60m, 윗단의 직경이 40m에 이르고 그 위에 봉토를 하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200m X 200m 규모의 신석기 석성 터가 남아있다.

 

2)우하량유적지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거의 홍산문화 유물이며 청동기는 일체 없지만 제단의 규모, 왕릉의 규모가 개세적이라서 중국 역사학계에 역사적 쇼크를 주었다. 우하량 적석총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는 약 5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왕릉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고려하면서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고려한다. 그리고 최상부의 여신묘는 복희와 부부였던 여와신女媧神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여와신은 복희와 함께 뱀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어도 곰은 아니었다. 이곳 여신묘에는 특별하게도 곰의 턱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림  참조)
그래서 이 홍산문화 적석총의 주인은 환웅과 웅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산문화 특유의 적석총 묘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적석총, 서울 송파의 적석총, 경주의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우하량유적지는 유적지의 분포가 넓고 많다. 우하량 유적지는 20여개 지점이며 그중에 5개 지점의 적석총군이 대표적이다. 적석총 2지점은 150 x 80m 규모다. 2지점의 제단은 3층 원형의 돌제단이며, 4기의 춘추시대 적석총과 여러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3지점은 2지점의 북쪽 200m 거리에 있는데 적석총 1기와 8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5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서쪽 882m 지점이고 2기의 적석총과 발굴하지 않은 석곽묘가 있다. 4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577m이다. 미발굴이다. 또한 3지점 1000m 북쪽에는 여신묘(女神墓) 건축유적이 있고 여신묘 북쪽에 규모가 작은 적석총 6지점, 7지점, 8지점, 9지점이 있다. 5지점 남쪽에는 금자탑(金子塔)으로 불리는 직경 100m의 3층 원형 토단(土壇)이 있다.  

우하량은 홍산문화의 보통 석곽묘(石槨墓)제에 더하여 최초로 적석총(積石塚)으로서 산릉(山陵)을 쌓았다. 

여신묘 건축지로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더불어 곰의 머리뼈가 출토되어 곰 토템과 여제사장으로서의 웅녀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신의 두상에는 옥으로 눈을 만들었고 그외 작은 여신상, 생육여신 (生肉女神)상도 있다.

진흙 여신상과 곰 턱뼈

 금자탑(金子塔)은 3층의 대형토돈(大型土墩)으로서 윗층은 반경 40m이고 하층 외곽은 반경 60 - 100m에 이르는데 각층마다 8-15m 높이의 석축을 쌓고 중앙을 흙으로 채웠다. (약 bc. 1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금자탑은 중국 동남해안, 양자강 하류와 태호(太湖) 부근의 양저문화(良渚文化)의 제단 및 옥기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양저문화는 치우 청구국의 산동반도 이주로 인해 영향을 받아서 옥기가 번성한 문화다.

우하량에서는 홍산문화의 최정수라고 할수 있는 각종 옥기들이 최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옥조룡(玉彫龍)이 대표적으로 많고, 구름무늬 옥패(玉牌), 옥벽(玉璧), 쌍련옥벽(雙聯玉璧), 삼련옥벽(三聯玉璧), 옥종형기(玉琮形器), 옥탁(玉鐸), 옥완(玉瑗), 옥비식(玉臂飾), 옥고(玉[]),  옥고형기(玉[]形器), 옥거북이, 새조각, 수면형(獸面形) 옥패식 등이다.




                                                                우하량에서 발굴된 옥기

우하량의 도기는 용린문(龍鱗文) 흑도(黑陶), 홍도(紅陶), 자도(紫陶) 등 채도가 많이 나오는데 종합하면 매우 강력한 신권 국가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객좌현
(客左縣)에서도 제사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객좌현성에서 서쪽으로 3.5km 지점의 흥륭장향 장경여자촌 대릉하 서안의 동산취 후량 정상부에서 네모난 돌을 쌓아올린 돌담벽과 쌍두룡옥황 , 녹송석 조각 새 등 장식과 형체특이적 채도기가 대량 발굴되었다.
유적지 남부에서 직경 8m의 원형제단이 발굴되었다. 제단 주변은 석판을 대고 안에는 크고 작은 돌을 덮어 쌓았다.  
즉 , 북부는 네모 방형이고 남부는 원형이니 전방후원고분에 대응된다. 탄소측정 연대는 대략 5000년전이다.
여성나체임부조각상, 대형임신부좌성이 발굴되어 생육신상이라 한다.
그외 타격석기, 돌도끼, 세석기, 뼈화살촉 등이 나오고 홍도편, 채도편, 흑도편, 지자문 위주 질그룻이 많았다.

3)부하구 유적지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 복희伏犧인데, 점복술로 인하여 여와복희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 낙랑을 거쳐 진陳으로 갔는데 산서성을 다스리다가 산동성으로 갔다.  

내몽고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河 유역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화富河溝文化는 약 5300년전에 시작되었는데, 촌락의 방이 원형인 것이 추가되고有方形、圓形兩種 방 중앙에 화로 구덩이有灶坑가 나타나고 불을 피워서 추위를 막고 음식을 끓여 먹었고, 그외 뼈를 불에 구워서 점을 치는 복골卜骨이 나왔다. 이는 중국 최초의 복골이며 은허의 복골 문화가 본래 홍산문화 신시의 복희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은나라 은허 문명은 바로 홍산 문화와 용산문화의 후손이다. 동시에 은나라 갑골 상형 문자도 여기서 발생하여 전래된 것이다. 한자漢字도 중국인들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동이민족이 홍산문화에서 개발한 기호로서 만들어진 양의 문자이다.

 

4. 홍산문화의 특징

1) 홍산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소위 빗살무늬 도자기 시대였던 선홍산문화인 예맥시대의 단순 기하문의 질박한 회색, 혹은 황색 토기에서, 홍색 토기에 검은 무늬의 새로운 문화 세력이 이입된 것이다.

2) 홍산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다양하고 정교한 옥기다. 용, 돼지용,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등과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纹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돌무덤이다. 돌을 쌓은 적석총積石冢도 나타나고 석곽石槨 무덤과 석관石棺 무덤도 나타난다.

석관무덤은 요녕성 우하량牛河梁, 하북성 평천平泉 위장圍場 당산唐山 적봉시 홍산紅山과 하가점夏家店, 영성寧城 등에 존재한다.

4) 네 번째 특징은 화로를 이용한 난방과 역시 불을 이용한 복골의 출현이다.

5) 다섯 번째 특징은 암각화의 기록이다. 태백산이었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서요하의 지류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百岔河 계곡를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암각화가 발달해 있다. 강안을 따라서 100리에 걸쳐서 약 140개의 암벽에 가지가지 주제로 벽화가 남아있다.

여러곳의 암화와 비교하여 이곳의 암화 주제 중에 사슴이 유독하게 많다. 부여가 원래 사슴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반면에 부루는 늑대를 가리킨다는데 단군 부루가 산동에 세운 낭사군 낭사대琅邪臺도 늑대의 낭狼이다.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 암각화 모음 

 

백분하 암각화에는 수렵화, 부엉이형 인물화, 군무화群舞畵, 생식화生殖畵, 천체성수화星宿畵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성자에서도 사냥 기마도 같은 암화가 보인다.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예술로 추정하지만 일부는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현되어 신석기에 암각화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제가 주로 사냥과 목축이므로 유목민족의 생활이기에 환웅이 도래한 홍산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고려한다.

 

홍산문화의 범위는 동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서쪽으로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 남쪽으로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북으로는 서요하西遼河 북쪽까지 광할한 지역이다. 홍산문화는 대략 bc4800년에서 bc2200년까지인데 [한단고기韓檀古記-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기록상의 환웅시대인 bc3898년에서 bc2333년까지와는 하한下限이 거의 일치한다.

 

웅녀족과 같은 곰 토템을 현재도 가진 에벤키鄂溫克, ewenki 민족은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 solong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사하공화국 야쿠트공화국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곰,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지야지신(치우기?)을 경배하고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은데 이들로 인해 샤만 연구가 생겨났다. 아무튼 이들의 유목 생활 풍습이 백분하 계곡의 암각화이기도 하다.